'理_앓음다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20.01.17 1월 15일.
  2. 2019.04.27 4월 27일
  3. 2019.04.16 amazarashi, 星々の葬列
  4. 2019.03.21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1
  5. 2019.03.14 3월은 미치광이의 달
  6. 2018.12.31 I will take care of myself, I will.
  7. 2018.12.30 어느 12월의 기록 1

1월 15일.

2020. 1. 17. 16:21 from 理_앓음다움.

 

*

내년 다이어리가 출시되는 시즌이 올 때마다 그는 마음이 초조해짐을 느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1월 15일은 그가 살고 있던 방의 전세 계약이 끝나는 날이었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떠나고 싶어서 방을 새로 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주민등록등본을 가득 채운 방의 역사들을 돌이켜 보건대 모든 방은 계약 전에는 그럴듯해 보였으나 조금만 살아보면 제각기 문제를 안고 있기 마련이었다.

어떤 방은 층간 소음이 문제였고, 어떤 집에서는 공용 복도에서 빨래를 말릴 때마다 속옷이 사라지곤 했다. 신고를 여러번 하곤 했으나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의 행각이 멈춘 것은 CCTV를 설치한 이후의 일이었다. 어떤 방은 겨울에는 미처 몰랐으나 여름에는 정말 죽을 만큼 무더웠다. 곧 이사갈 때 에어컨 이전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웠기에 제습기, 써큘레이터 등을 하나씩 구입하고 나니 사실상 에어컨과 비슷한 돈이 들기도 했다. 어떤 방은 지하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구조였다. 멀리 사는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이 상황을 하소연 해보곤 했지만 이미 주인도 포기한 듯, 젊은이가 지하에 사는 할머니를 좀 이해달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는 창문을 닫았고 할머니는 여전히 담배를 피워댔다.

 

*

처음에는 어리숙해서 허튼 방을 계약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 방을 옮기면서 방을 보는 눈높이는 높아지고 안목도 길러졌지만 방은 살아볼 때에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한 계절을 다 살아보고, 또 이웃이 누가 살고 있는지를 모두 알고보고 방 계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의 문제도 아니었다. 서울 대부분의 구와 동네들의 이름을 외웠지만 마주치는 문제점은 항상 비슷했다. 결국 문제는 지금 그가 지닌 자금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방은 모두 어느 정도의 결함을 지닌 방임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아무리 꼼꼼해져도 여유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두 문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을 수업료로 냈다니 조금은 억울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기준은 넓이였다. 여전히 ‘평’ 개념의 공간감에 익숙했던 그는 이제 누구보다 빨리 방 넓이를 3.3으로 나누어 방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

‘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없었다면 얼마나 삶이 비루했을까라고 그는 자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넓이가 확보된 방을 구하면 그는 방을 여러 물건들로 적당히 채워 넣었다. 방을 옮길 때마다 이케아에 가서 쇼룸을 보고 새가구를 하나 정도는 샀고, 개중 낡은 가구는 항상 버렸다. 이케아 가구를 처음 개봉하고 조립할 때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 이게 일조량이 적은 스웨덴인들이 즐기는 ‘우드워크’려나 그는 오래전 어디선가 배운 영어단어를 떠올렸다. 방에서 혼자 하는 ‘우드워크’는 너무나 쉽게 끝나서 초라한 감도 들었다. 그러나 언젠가 지금 산 이 가구도 버리겠지만 그 쉽게 버릴 수 있음에, 미니멀리스트인 그는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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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2019. 4. 27. 21:54 from 理_앓음다움.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 세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락은 그 나이 언저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분기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2009, 76-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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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와서 생각해보니'란 말을 이제와서 생각한다. 너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새삼. 그렇다.


2. 너가 진심으로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부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길, 넌 강한 사람이니까.


3.  It's the terror of knowing what this world is about. But, we will never meet the ground.


4.  For the candles in the darkness, burning up the sorrow. There’s no end to sadness, we didn’t learn that.


5. 작년을 넘어서면서 나의 세계가 견고해지고, 두터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돌린다. 그리고 적어도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다.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아직도 난 어쩔줄 모르고 고민만 하고 있는걸까.  나는 그 이후, 더 바깥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을까. 이 세계를 누군가와 나눌 수는 있는걸까?


6. 아르메니아라는 나라에서는 춘분이 새해의 시작이라지. 춘분의 봄비와 함께 새해가 왔으면 좋겠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새 공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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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1고는 3월 7일에 완성했다. 3월 7일은 무척 추운 토요일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3월을 미치광이 달이라고 한다. 날씨나 기온의 변화가 제멋대로이고 급격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따끈따끈하여 봄날같더니,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한겨울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날은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정원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그리고 쉬지 않고 열일곱 시간을 써내려갔다. 한밤중에 소설이 완성됐다. 일기를 보니 사뭇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딱 한 마디 '아주 좋다'라고 쓰여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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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가 아님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가 싫어. 하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어차피 나는 나야. 내가 나를 허락하면 괜찮은 거야.’ 이 메시지는 단순히 나는 내가 좋아.’로 귀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신지는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을 뿐, 여전히 그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보완 이후 현실에 눈을 뜬 신지는 여전히, 아니 당연히,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었을 테다.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의 씨앗만 심어 두었을 뿐, 여전히 그는 자신, 타인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을 상처 입힌다. 카오루가 경고한 대로이다. 그리고 신지는 이미 그것을 각오했다.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그래도 그런 현실을 견딜 자신이 있어서
여기 있어도 돼?’에 대해 신지 스스로 내린, 값진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 메시지가, 단순히 나는 여기에 있어도 돼.’가 아님을 잘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가 싫어. 하지만 좋아할 수 있을 것도 같아. 어차피 나는 나야. 내가 나를 허락하면 괜찮은 거야.’ 이 메시지는 단순히 나는 내가 좋아.’로 귀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극히 현실적이며,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신지는 여기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깨달았을 뿐, 여전히 그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보완 이후 현실에 눈을 뜬 신지는 여전히, 아니 당연히, 스스로를 혐오하고 있었을 테다. 마음 아주 깊은 곳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의 씨앗만 심어 두었을 뿐, 여전히 그는 자신, 타인이 두려웠다. 그래서 남을 상처 입힌다. 카오루가 경고한 대로이다. 그리고 신지는 이미 그것을 각오했다.상처 입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그래도 그런 현실을 견딜 자신이 있어서였다. 아주 중요한 차이이다!

1.

여기 있어도 돼?’란 질문을 대한 답을 생각해본다.

그 답이 단순히 '나는 여기에 있어서 좋아'일 수는 없다. 그건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2.

"나는 내가 싫어. 항상 사라지고 싶을만큼. 하지만 언젠가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차피 나는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나'를 허락하다면 괜찮을거야. 그냥 그렇게 있고 싶어. 그래,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 이게 오히려 더 지금 나의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 솔직한 답이다.


3.

스스로를 긍정한다는 것은 나 같은 삐딱이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목표다.

항상 나에게 허락되는 것은 '또다른 가능성'일 뿐이지, 이전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워진 결과물로서의 이상적인 나는 아닐 것이다. 내가 지닌 공허는 내가 앞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더라도 쭉 계속 될 것이다.


4. 

올 한 해 몸과 마음 속에 심어낸 것은 '내가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인셉션. 그 작은 씨앗이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긴 호흡으로 두고 보자.


5.

여전히 관계에서 상처를 입었고, 상처를 주었고, 나 스스로를 종종 혐오했으며 타인을, 그리고 세계를 두려워했다. 여전히 2017년으로부터 회복 중. 2008년에 이어 2018년은 큰 변곡점이었다.


6.

여러 번의 순례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된다. 어쩌면 삶 자체가 순례다.

그러나 계속, 어떤 각오를 하게 된다.


7.

앞으로 남에게 상처주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는 아니다.

'그런 현실'을 어찌저찌 견뎌낼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올 해

많이 배웠다.

Posted by 양웬리- :

어느 12월의 기록

2018. 12. 30. 00:49 from 理_앓음다움.

1. 누군가를, 아니 이번 생에 나 자신을 정말이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조우en-counter할 수 있을까. 또 설령 그렇다한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세상은 정말이지 희소하게 존재한다는 말은 너무나도 맞는 말이다.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게 잘 안된다고 힘들어하는 것이 나한테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일 수 있지만, 세상은 그걸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 이건 잔인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것이다.


2. 나와 세상 사이에서 위화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마다 나는 텍스트 속으로 '휙' 도피해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가 현재 있는 곳이 리얼 월드가 아닌 일종의 판타지 월드라는 점은 머리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넓다. 작은 은신처를 넘어서 좀 더 밖으로도 나가봐야 한다. 나의 세상은 그동안 너무나도 왜소해지고 말았기에.


3. "나여만 한다, 나이기 때문에 안된다, 나여만 한다"가 끊임없이 루프 중. 그런 상황 속에서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고 해방감에 가까운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급부로 '지금 이 곳'의 나를 충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 나 역시 "어디에 가서도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와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경험 자체가 무의미한 '공회전'이었다고는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경험이 공회전이 되버리게 만드는 것은 현재의 나의 선택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모욕당한 인간이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다면 나는 패배하지 않은 인간이 될 수 있다. 후자의 길을 택한다. 


4. 그렇기에 어떤 막연한 기대들이 뭉게뭉게 생기고, 그렇게 생겨난 기대들이 내 눈과 마음을 흐리게 했다. 가장 두고두고 아픈 부분이다. 나를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런 부분들을 좀 더 섬세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타자/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물론 안 되겠지만 말이다.  마초가 되지 않겠다는 선택이 영원히 순진한 척하는 어린 아이로 남아버리는 선택이 되어버렸다는 싸한 느낌도 있다. 바보같아.


5. 텍스트 속의 세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면서도, 텍스트 바깥에서도 온전하면서도 유능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면 항상 아빠한테 들었던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모골이 송연해진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공부를 정말 잘했지만,  사회생활 측면에서는 샌님처럼 너무나도 무능했고, 사태를 직시하지 않고 최대한 책임을 도피해버린 할아버지. 할아버지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릴 때는 할아버지의 좋은 면이 눈에 들어왔다면, 요새는 그런 면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아빠로부터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나의 영원한 반면교사.


6. 세상 바깥도 무서운 게 맞지만, 현재는 텍스트 안의 세계도 무서워서, 가끔 꿈도 꾼다. 텍스트에 잡아먹히는 꿈. 둘 다 마주해야 한다. 더 피할 수는 없다. 반격을 시작하자. 어차피 누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잖아? 까짓 것. 


7. 목소리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내 '단조로운' 목소리가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조금은 서툰 수단이며, 타인에게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리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 목소리를 조금 한 톤 정도 높이고, 다양하게 소리를 내보면 좋겠다는데...가끔 내가 깔깔거리는 목소리는 너무 높고, 평소의 목소리는 너무 낮고 변화가 적은 편이어서  나도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적당선을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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