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5일.

2020. 1. 17. 16:21 from 理_앓음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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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다이어리가 출시되는 시즌이 올 때마다 그는 마음이 초조해짐을 느꼈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1월 15일은 그가 살고 있던 방의 전세 계약이 끝나는 날이었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떠나고 싶어서 방을 새로 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주민등록등본을 가득 채운 방의 역사들을 돌이켜 보건대 모든 방은 계약 전에는 그럴듯해 보였으나 조금만 살아보면 제각기 문제를 안고 있기 마련이었다.

어떤 방은 층간 소음이 문제였고, 어떤 집에서는 공용 복도에서 빨래를 말릴 때마다 속옷이 사라지곤 했다. 신고를 여러번 하곤 했으나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범인의 행각이 멈춘 것은 CCTV를 설치한 이후의 일이었다. 어떤 방은 겨울에는 미처 몰랐으나 여름에는 정말 죽을 만큼 무더웠다. 곧 이사갈 때 에어컨 이전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웠기에 제습기, 써큘레이터 등을 하나씩 구입하고 나니 사실상 에어컨과 비슷한 돈이 들기도 했다. 어떤 방은 지하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구조였다. 멀리 사는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이 상황을 하소연 해보곤 했지만 이미 주인도 포기한 듯, 젊은이가 지하에 사는 할머니를 좀 이해달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는 창문을 닫았고 할머니는 여전히 담배를 피워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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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리숙해서 허튼 방을 계약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러 번 방을 옮기면서 방을 보는 눈높이는 높아지고 안목도 길러졌지만 방은 살아볼 때에만 비로소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한 계절을 다 살아보고, 또 이웃이 누가 살고 있는지를 모두 알고보고 방 계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의 문제도 아니었다. 서울 대부분의 구와 동네들의 이름을 외웠지만 마주치는 문제점은 항상 비슷했다. 결국 문제는 지금 그가 지닌 자금으로 서울에서 구할 수 있는 방은 모두 어느 정도의 결함을 지닌 방임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아무리 꼼꼼해져도 여유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런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두 문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을 수업료로 냈다니 조금은 억울한 마음도 들기도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기준은 넓이였다. 여전히 ‘평’ 개념의 공간감에 익숙했던 그는 이제 누구보다 빨리 방 넓이를 3.3으로 나누어 방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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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이란 말이 없었다면 얼마나 삶이 비루했을까라고 그는 자주 생각했다. 어느 정도 넓이가 확보된 방을 구하면 그는 방을 여러 물건들로 적당히 채워 넣었다. 방을 옮길 때마다 이케아에 가서 쇼룸을 보고 새가구를 하나 정도는 샀고, 개중 낡은 가구는 항상 버렸다. 이케아 가구를 처음 개봉하고 조립할 때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 이게 일조량이 적은 스웨덴인들이 즐기는 ‘우드워크’려나 그는 오래전 어디선가 배운 영어단어를 떠올렸다. 방에서 혼자 하는 ‘우드워크’는 너무나 쉽게 끝나서 초라한 감도 들었다. 그러나 언젠가 지금 산 이 가구도 버리겠지만 그 쉽게 버릴 수 있음에, 미니멀리스트인 그는 감사함을 느꼈다.

 

Posted by 양웬리- :

  학령기 첫해의 신체검사 기록은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이후의 기록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혈액형은 평생에 걸쳐 RH+O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런 것들도 잘못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내게는 없다. .... 상식으로 널리 알려진 기초적 생물학 지식과 오쟁이 의식의 결합이 낳은 비극이었다. 아버지 역시 당시싸지 자신의 혈액형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일이 나를 잠깐 멀리 보내는 데 일조했다(1). 

   ... 언제나 IMF 핑계를 대며 용돈을 주지 않던 부모들의 한숨과 더불어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세계는 끝장나리라'는 정서였다. 그건 내가 곧 해산될 지경에 놓인 회사에서 순장조임을 예감하며 머무리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두렵지만 설레는 것이었다. 만약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눈을 꼭 감고 소멸하리라, 생각했던 내게 아른거리던 이미지는 언제나 임사 체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분신사바를 하며 놀았던 친구들과 체육관 구석 매트리스 더미에 기대앉아 소멸하는 장면이었다. 노트에 그런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다. 거기 부모는 없었다(6-7).

  아마도 혼자였을 거야.

  팟.

  하얀 플래시가 터졌고 그 때 나는 죽었어(8).

  이것이 서울 피토레스크였다. 교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1999년의 우리들이었다면 다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긴 우리가 죽은 세상이야, 우리는 이 곳에서 적응해서 살든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노력해야 해,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빠져나가면 다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노스트라다무스를 구루로 모시던 친구는 아니, 그곳은 암흑, 세상의 끝이지, 라고 말했을 것이고, 버뮤다 삼각지대를 날마다 상상하던 친구는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곳에 있어, 라고 말했을 것이며 우주 때문에 잠 못 자던 친구는 괜찮아, 유니버스는 무한하니까, 어디든 갈 곳이 있어, 라고 말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하는 아주 내밀한 이야기였다(12).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 잠깐 죽었을 뿐이었다.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임사 체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력의 불안정함에 대해 생각하다 영상미디어과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잠깐 죽었을 뿐이었는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13).

 

  나는 눈이 멀었던 적이 없었다. UO의 몽타주가 제 교복 셔츠의 넥타이를 풀어 내 눈을 감겨 버렸기 때문에 암흑에 갇혔을 뿐이었다. UO는 컴컴해서 플래시가 터졌고, 그 때 내게는 실제로 들리지 않았을 소리, '팟'이 환청처럼 들렸으며, 그 때 영혼이 달아났다. 담배를 피우러 다녀온 아버지는 비상구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상담사에게 대답했다.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 때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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