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작은 건 작은거지. 양코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건 작은 거, 작은 건 좋은 거지? 그는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억양으로 말했고 태순은 왜 작은 게 좋은 건지 생각했다. 작은 건 나쁜 거 아닌가(153).


명동에서 종로까지 걸으며 유리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신축 빌딩과 아케이드 안으로 사라지는 사람들, 바스러질 것 같은 구한말의 집들과 일제시대에 지어진 백화점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고 건물 사이를 들고 나는 바람과 사람들의 차림, 버스가 새로 개통한 고가도로를 올라가는 풍경을 보았다. 양코씨는 자신이 바로 그렇다고, 나와 똑같다라고 말했다(153-154).


그건 나도 그래, 너랑은 다르지만 나도 그래, 68혁명이 일어나고 야스다 강당이 해방되고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검은 장갑 시위대가 행진하고 기동대가 투입되고 박살 난 동경대생들이 질질 끌려나오는데 나는 여기서 뭐 하지, 반도호텔과 삼성빌딩 사이에 서서 골목을 돌아나오는 바람, 서울 시내의 골목을 휘젓고 튀어나온 젤리 같은 부드럽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감상에 젖기나 하다니, 그렇지만 내가 서울에 살기로 한 것도 이 바람 때문인데, 베를린과 토오꾜오를 본뜬 서울의 건물들 사이를 거닐며 액화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면 안되냐고 양코씨는 생각했고 이쪽으로 가요, 오늘은 남산을 가요,라고 말했다(155).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 기분이 아침마다, 가끔 밤의 침묵 속에서 불쑥 솟아올랐고 그건 아무래도 지금 시대 때문 아니겠어요? 라고 양코씨는 말했다. 모든 게 변하고 있고,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하고 양코씨는 말했다(156).


우리는 모두 왠지 모를 힘에 이끌려 낯선 공간과 관계 맺어지는데 그 힘을 일컬어 시간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 때는 미래라는 말이 너무 좋고 일기에 미래를 여러번 반복해서 쓰며 아이를 낳게 되면 아들딸 구분 없이 미래라고 하자, 미래에는 남녀 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르고, 미래에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아이가 있을지 모르고, 미래에는 미로로 만들어진 방과 건물, 도시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도 지치지 않고 두렵지 않고 예기치 않은 조우와 나무가 우거진 광장을 가로지르는 자전거, 테라스를 맴도는 새떼의 울음소리, 쇼윈도에 비친 초록색 베레모와 다리 아래를 오가는 작은 자동차 무리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일지도 모르니 미래를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158-159).


태순은 어린 시절부터 아케이드를 좋아했다,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거대한 말발굽, 밝고 투명한 심해어의 내장, 안과 밖, 위아래가 연결되고 갈라지는 선로의 분기점, 소화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찌꺼기와 찌꺼기를 먹고 사는 기생충의 흐름 같은 것들, 태순은 말했고 야오씨는 이상한 취향이 아니라 할 수 없다며 세운상가에 오면 오오사까의 우메다 지하상가가 생각나는데 자신은 지하가 싫고 아케이드도 싫고 워커힐도 싫고 국립경기장도 싫다, 그리고 미래가 싫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들의 미래지 우리 미래가 아니요, 그들의 진보지 우리 진보가 아닙니다, 정말 오오사까에 갈 생각입니까, 양코씨는 물었고 태순은 방 안에 틀어박혀 <운수좋은날> 따위를 읽는 것보단 낫겠죠, 언제까지 여자 패는 소설을 읽고 있을 작정이에요, 라고 말했다고 했지만 어쩌면 아무 말도 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159).


오오사까에 온 양코씨는 만국박람회의 핵심은 태양의 탑도 아니요, 인공위성도 아니요, 인류의 조화와 진보도 아닌 무빙벨트에 있다며 무빙벨트가 필요한 곳은 오직 하나, 회전초밥집뿐입니다,라고 했지요(163).


출품된 한국영화는 '언제나 타인'이라는 제목의 신파로 미찌꼬와 봤는데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지요. 저는 늘 이해할 수 없는 격차를 느끼곤 합니다, 왜 미래학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한국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토록 다르고 한국관과 한국관을 만든 사람들이 다르며 만박과 만박을 만든 사람들이 다른 것인지요, 저는 어디에도 피트하게 들어맞지 않는데 이것은 장소보다 시간을 꿈꾸게 합니다, 기술을 찬양하는 것과 기술을 비판하는 것, 박람회에 참가하는 것과 박람회를 분쇄하는 것, 국가에 동조하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해 입는 것이며 그런 옷을 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였지요, 라고 태순은 말하며 그녀가 보기에 양코씨와 김원, 조영무는 모두 그러한 몸을 가진 사내들로 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저는 누구보다 오래 한국관에 머물렀고 신문기사에도 나왔지만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가요,라고 말했다(166-167).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은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 라고 말했다(168).




Posted by 양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