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오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따라 웃다 말고 뒤통수가 서늘해졌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와야 해. 그렇게 말하던 언니의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언니의 목소리는 기운 차고 선량했다. 그런데 나는 왜 웃었을까. 따라 웃고 말았을까. 언니는 더없이 친절했는데. 우리 남매에게 티끌만큼의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가 곤혹스럽게 느껴졌다. 이날의 일이 흰 타일 위에 지워지지 않고 연하게 밴 카레 얼룩처럼 마음에 오래 남아 있다(180).

 

  인회 언니는 자신의 의견을 그대로 적어 교수에게 메일로 보냈다. 이틀만에 답장이 왔다.

  그러니까 잘 살펴보라는 거예요. 구선생에게 큰 공부이자 도전이 될테니.

  평소에 스스럼없이 '너'라고 부르던 민교수는 인회 언니를 '구선생'이라 칭했다. 전에 없이 경어체까지 사용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번역하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음을 언니는 그제야 깨달았다고 한다(182).


  그녀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웃었다.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것이 인회 언니가 무언가를 택하는 방식이었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186).


  내가 보기에 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최선을 다해 선택하고 최선을 다해 포기하고 최선을 다해 먹고 최선을 다해 땀 흘리는 사람. 인회 언니와 보낸 그 겨울 동안 나는 맑고 쨍한 호수를 누비며 헤엄치는 새끼은어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 모든 점심의 밥값을 전부 다 인회 언니가 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깨달았다. 우리의 식대도 프로젝트비에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라고 나는 넘겨버렸다. 물론 밥을 사주었기 때문에 인회 언니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187).


  인회 언니의 이름은 책 어디에도 없었다. 역자후기에는 이 뛰어난 학습서의 저자이자 위대한 학자, 동시에 우리의 다정한 친구인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인사뿐이었다.

  혹시나 하여 맨 뒷장부터 다시 샅샅이 뒤졌지만 언니 이름은커녕 이니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맙다는 말, 아니면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어딘가에 한 줄 들어있기를 나는 절실한 심정으로 바랐다. ... 우리는 아직 어른들의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197).


  교문을 나오자마자 갈림길이었다. 다른 길로 헤어지기 전에, 언니는 내게 언제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꼭."

  의례적으로 하는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럴게요, 꼭."

 나는 대답했다. 언니가 먼저 떠났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내 방향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201-202).



Posted by 양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