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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1.03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2018 2/3 릿터 10호.

  학령기 첫해의 신체검사 기록은 여러모로 의심스럽다. 이후의 기록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혈액형은 평생에 걸쳐 RH+O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런 것들도 잘못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내게는 없다. .... 상식으로 널리 알려진 기초적 생물학 지식과 오쟁이 의식의 결합이 낳은 비극이었다. 아버지 역시 당시싸지 자신의 혈액형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일이 나를 잠깐 멀리 보내는 데 일조했다(1). 

   ... 언제나 IMF 핑계를 대며 용돈을 주지 않던 부모들의 한숨과 더불어 우리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세계는 끝장나리라'는 정서였다. 그건 내가 곧 해산될 지경에 놓인 회사에서 순장조임을 예감하며 머무리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두렵지만 설레는 것이었다. 만약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온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손을 잡고 눈을 꼭 감고 소멸하리라, 생각했던 내게 아른거리던 이미지는 언제나 임사 체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분신사바를 하며 놀았던 친구들과 체육관 구석 매트리스 더미에 기대앉아 소멸하는 장면이었다. 노트에 그런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다. 거기 부모는 없었다(6-7).

  아마도 혼자였을 거야.

  팟.

  하얀 플래시가 터졌고 그 때 나는 죽었어(8).

  이것이 서울 피토레스크였다. 교수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1999년의 우리들이었다면 다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긴 우리가 죽은 세상이야, 우리는 이 곳에서 적응해서 살든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노력해야 해,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빠져나가면 다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노스트라다무스를 구루로 모시던 친구는 아니, 그곳은 암흑, 세상의 끝이지, 라고 말했을 것이고, 버뮤다 삼각지대를 날마다 상상하던 친구는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곳에 있어, 라고 말했을 것이며 우주 때문에 잠 못 자던 친구는 괜찮아, 유니버스는 무한하니까, 어디든 갈 곳이 있어, 라고 말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끼리만 하는 아주 내밀한 이야기였다(12).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 잠깐 죽었을 뿐이었다.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고.

  그 일을 계기로 임사 체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력의 불안정함에 대해 생각하다 영상미디어과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잠깐 죽었을 뿐이었는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13).

 

  나는 눈이 멀었던 적이 없었다. UO의 몽타주가 제 교복 셔츠의 넥타이를 풀어 내 눈을 감겨 버렸기 때문에 암흑에 갇혔을 뿐이었다. UO는 컴컴해서 플래시가 터졌고, 그 때 내게는 실제로 들리지 않았을 소리, '팟'이 환청처럼 들렸으며, 그 때 영혼이 달아났다. 담배를 피우러 다녀온 아버지는 비상구 문 앞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상담사에게 대답했다.

  나는 죽었던 적이 있어요.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 때 죽었어요.

Posted by 양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