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포래에 얼어붙는 섣달 그믐 
밤이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어머닌 
서투른 마우재말도 들려주셨지 
졸음졸음 귀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박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어드는 
어머니의 입김의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거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텁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 오도 못할 우라지오
Posted by 양웬리- :

그래, 그럴 수밖에. 누군가와 함께 살았었으니까.

이 년?

응, 이 년.

그러면 총 삼 년을 산거네.

그런데 마치 삼십년을 산 집처럼 그 집이 지겨워졌어. 도망치듯이 떠나야했어.

그럴 수밖에. 누군가와 함께 살았었으니까.

그가 먼저 떠났었으니까(67-68).

 

전화를 끊고, 굽은 등을 펴고, 주저앉아 울었어. 그러고 보니 난 서른 살이었어. 겨우 서른 살이었어.

그를 사랑했니?

응, 그를 사랑했다.

누구를 말하는 거니. K? 아니면 프랑스 남자?

누구든. 모두. 떠난 모두. 떠났으므로(74).

 

먼 훗날 다시 한번 주울거지?

응, 아마도.

기억도 할 수 없는 오래 전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불쑥 다가올 때.

응, 길을 걷다 불쑥.

그 일을 이해해야 하니까.

아냐. 꼭 그런 것은 아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마 결코 그 일을 이해하진 못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일은 세상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단 하나의 불가사의로 눈부시게 빛날거야.

그럼 왜 줍지?

기억 속 찬란한 순간을 위해. 믿기 어렵지만, 다시 한번 그 순간을 살기 위해(87).

 

 

Posted by 양웬리- :

1. '이제와서 생각해보니'란 말을 이제와서 생각한다. 너의 목소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새삼. 그렇다.


2. 너가 진심으로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부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길, 넌 강한 사람이니까.


3.  It's the terror of knowing what this world is about. But, we will never meet the ground.


4.  For the candles in the darkness, burning up the sorrow. There’s no end to sadness, we didn’t learn that.


5. 작년을 넘어서면서 나의 세계가 견고해지고, 두터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돌린다. 그리고 적어도 그 안에서 나는 자유롭다.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밖의 세계에서는 어떨까. 아직도 난 어쩔줄 모르고 고민만 하고 있는걸까.  나는 그 이후, 더 바깥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을까. 이 세계를 누군가와 나눌 수는 있는걸까?


6. 아르메니아라는 나라에서는 춘분이 새해의 시작이라지. 춘분의 봄비와 함께 새해가 왔으면 좋겠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새 공간을 기대한다.



Posted by 양웬리- :

"소설 제1고는 3월 7일에 완성했다. 3월 7일은 무척 추운 토요일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3월을 미치광이 달이라고 한다. 날씨나 기온의 변화가 제멋대로이고 급격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따끈따끈하여 봄날같더니, 하룻밤 자고 나면 다시 한겨울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날은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정원에서 가볍게 조깅을 하고, 그리고 쉬지 않고 열일곱 시간을 써내려갔다. 한밤중에 소설이 완성됐다. 일기를 보니 사뭇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딱 한 마디 '아주 좋다'라고 쓰여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Posted by 양웬리- :

10여 년이 흐른 지금, 새벽녘, 출근길에 오르는 사람들 틈에 서서 기차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베를린의 기차역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내 앞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정차하는 낡은 기차, 그 유리창 위로 비친 내 얼굴은 생활의 피로에 젖어 있는 다른 승객들의 얼굴을 꼭 닮아 있었고, 베를린 동역에서 힘차게 기차 위에 올라탔던 어린 승객과는 조금도 닮은 점이 없었으니까요(34-35).


고작 5년 사흘을 함께 보냈을 뿐인 우리는 서로와의 재회에서 무슨 기적을 바랐던 것일까요? 우리가 감당하며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면 5년도 사흘도 허망하기는 매한가지인 시간일 뿐인데요(36-37).


당신들은 동양을 좋아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남북관계나 한국전쟁밖에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들의 동양에 한국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 부부 덕분에 여행 책자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세계를 좀 더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좋았습니다(38).


당신은 독일이 저지른 역사적 비극에 대해 말해주며 당시에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던 유대인 박물관에 다녀오라고 추천해주었고,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말에 당신이 가지고 있던 영역본 책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선뜻 꺼내어 내게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주아에게. 책의 내지에 짧은 메모를 해주던 당신 곁에 서 있을 때 맡았던 관능적인 향수의 향. 내가 사전을 찾아가며 더듬더음, 오랜 시간에 걸쳐, 그 책을 읽을 때마다 담배 냄새가 은은히 섞여 있던 그 향기를 떠올리곤 했다고 이야기했던가요? 내가 나중에 독일 정치사를 전공한 지호와 결혼해서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사상의 실현이 아니겠냐며 활달하게 웃었지요. 일본 문학 석삭까지 마친 내가 학업을 포기하고 독일로 남편을 따라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은 무척 안타까워했습니다. "남편이 유학 가면 아내가 학업이나 일을 포기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평범한 일이에요." 당신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내가 말했을 때 당신은 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습니다. "주아, 너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 자유가 있단다." 당신의 말이 내게 던졌던 파문. 고백하자면 나는 그 후로 선택의 순간이 올 때마다 주문처럼 당신의 말을 떠올리곤 했어요. 남편의 유학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 늦게나마 일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39).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든 나자바찌게 되어 있다, 공부가 좋아서 하다 보면 어쩌다 될 수 있는 것이 교수다(41).


시간강사 처우 개선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의 은사가 연구하려면 강의에 시간을 뺏겨서는 안 되는데 어째서 강의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지호를 나무랐던 날, 그날은 스승의 날이었어요. 지호는 그날 술에 취해서 비에 젖은 택배처럼 집으로 실려 왔습니다(41).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44).


나는 나의 피부색이 당신의 피부색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피부색은 내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보다는 밝았지요.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날 밤 골똘히 생각합니다. 앳된 마사지사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박하와 레몬으로 정성껏 문질렀습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44-45).


나는 이제 사원들을 바라보는 것이 싫어졌어요. 돌무더기에 핀 이끼와 그 위로 부서지는 빛은 틀림없이 아름다웠고, 무너져 내린 것들 사이를 지탱하는 수백 년 된 나무를 보는 일은 황홀했지만, 그것을 태연하게 향유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살점처럼 버려진 돌무더기 위에서 영어를 쓰는 아시아계 관광객과 프랑스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폐허를 만드는 데 아무런 일조를 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 모든 것이 그저 시간과 자연의 원리에 훼손되었다고 믿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45).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 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그렇지, 베레나?(51)".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54).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린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 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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