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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less Eight

2011/12/15 00:27 from 雜_앓음다움.



나의 끝나지 않는 8학기. Endless Eight. 
9월부터 12월까지 매일매일을 무한 루프중..

항상 시험 직전에 모든 것을 포기..
 뭐, 다시 반복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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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개인적인 기억의 단편을 상호연관된 조직을 이루도록 조립해 놓은 아상블라주이다. 기억의 범위는 지리적으로는 서울에서 울산에 이르며, 2010년 12월부터 11월까지의 시간을 아우르고 있다. 

  2011년, 나의 세계는 1월 11일 강남역에서 시작했다. 그날 참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강남역의 눈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1월, 울산 공업탑 앞에서 만났던 K. 올해 술을 너랑 같이 제일 많이 마셨구나. 항상 그렇듯, 즐거운 지적 자극으로 남아있다. '거의' 술에 취한 나를 데리고 창원까지 차로 모시고 가준  J. 올 해 초 너와 함께 갔었던 봉하마을과 이 떠오른다. 지금 있는 그 곳에서 원하는 바를 많이 이루길 바란다.  L과 신림동의 방을 함께 알아봤지만, L과의 동거는 성사되지 못했다.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던 L은 이제 행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대영웅서사시 <은하영웅전설>을 다보았다. 기대한 2년만의 수강신청.

   이후 나는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다.  2월, P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축하인사를 해주고 싶었으나 만날 수가 없었다. <Relentless Revolution>. 이 자리를 빌려, 치맥으로 만족한 H의 호의에 감사드린다. 숱한 고민 끝에 어려운-하지만 오랫동안 생각해왔던-결정을 내렸다.

  2월 12일, 무바라크는 물러났고, 리비아에서는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아간 고등학교. 마주하기 힘든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민망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 여러 낙서들. 2월 19일. J는 꿈을 찾아 떠나갔다. 선생님이었던 또다른 L은 끝내, 군대에 갔다. 그와 함께 건국대학교에서 세종대학교까지 걸었다.  상암에서 1년만에 다시 만난 B. B가 언젠가 줄, 프랑스어판 <소립자>를 기대하고 있다.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두려운 일인 동시에 떨리는 일이었다. 3월 2일 내가 느낀 설렘. 정말 오랜만에 느낀 즐거움이었다. 첫 수업은 수요일 민족사회학과 북한연구. 하지만 글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얀 백지에서 오는 두려움. H는 항상 부족한 나의 글을 읽어주었다.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신촌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로 조금이라도 보답이 되었길.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열심히 읽었다. 나는 좀 더 비관주의자가 되었고, 동시에 좀 더 낙천적이 되었다. 일본 대 지진을 보면서,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이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라는 점을 또 다시 생각했다.  

  "교양은 전공처럼, 전공은 대학원처럼!"
2년 만에 학기를 시작하는 나의 야심찬 각오였다. 
 
  신촌의 봄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매번 '무악'과 '관악'을 이어준 택시 기사 아저씨들에게 감사한다. 연대 동문의 비밀을 알려준 S에게도. H와의 서문 맛집 탐방과 S와의 귀갓길은 즐거웠다. K의 수업을 들은 것은 올 해의 가장 좋은 선택 중 하나였다. 이것저것 참 많이 읽고 '표준'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첫 시험 두 개는 완전히 죽을 쒔고 이를 기말에도 회복하지 못했다. 다른 K와 학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벚꽃은 언젠가 지기 마련이다. 벚꽃이 질 때 <싱글즈>를 보았다.  
 
   내 생일날 오사마가 사살되었고, 그는 인도양에 수장되었다. 이젠 안녕. 오사마. <디 오서>. 지켜지기를 기원했지만, 지켜지지 못했던 10년의 약속. 유가네. 이음서점. 그리고 다시 <소립자>. 24. 

  오랜만에 발표를 했다. 내가 여전히 좋은 웅변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 발표는 너무 준비를 많이 해서 지나치게 시간이 길어졌다. 발표란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그 사람이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혹은 들어주는 척을 한다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이클 도일을 만났다. K가  소개한 M과 관련된 책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충격을 받아 나는 그 책을 누워서 읽었다. 광주를 생각하며, 5월 28일 <오월애>를 보았다. <인터내셔널>과 <동방홍>을 다시 들었다. 혁명에 대해 생각했다.

  5월은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갔고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또다른 B가 무사히 돌아왔고, 우리는 모두 그의 귀환을 축하해주었다. B와 입구역까지 걸어가며 M의 이야기를 하면서, 대심문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말고사와 리포트를 마쳤다. S가 나보고 결혼을 꼭 해야하고, 그것도 일찍 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2시까지 술을 마셨고, 나는 입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바보같은 짓이었다.  

   비가 정말 끊임없이 계속 내렸다. 강남은 침수되었다. 힘이 전혀 없었다. 빈혈과 더불어 여름에 나한테 오는 일종의 고질병이다. 프랑스어와 영어 공부는 진도가 전혀 나가지 못했다. 학원까지 다녀보았지만, 허사였다. 그 동안 <세계정치론>을 틈틈이 번역했다. 웹툰이라는 형식이 등장한 이후 웹상에 존재한 거의 대부분의 웹툰을 보았다. P는 '연민의 굴레'를 특히 좋아했다. 나 역시 그랬다. 정든 집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웹툰을 봤다.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웹툰을 보지 않는다. 인류학 공부를 했다. 모스와 레비-스트로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중학교 때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 때의 친구들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없지만, 공간의 탓일까, 내가 다시 어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학교 때 즐겨듣던 노래로 MP3를 가득 채웠다. KIA 타이거즈는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다시 자전거를 즐겨타기 시작했다. P와 매일 아침 노원정보도서관을 다녔다. 중학교 때 끄적대던 여러 사랑 시집을 기증했다. 집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커져서, 처음으로 책을 누군가에게 팔아보았다. 슬픈 일이었다. <쌀과 소금의 시대>를 읽으면서 나만의 웹툰 콘티를 짰다. K가 군대에 갔다. M이 졸업했다. 진심으로 그의 졸업을 축하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오면서 새벽부터 일어나는 생활을 시작했다. (취침시간은 그대로였다!) 매일 6시 10분 새벽 지하철을 타고 학교로 왔다. 마지막 2학기라는 이름으로, 21학점을 생애 처음으로 넣어보았다. 청강을 2과목이나 했지만, 이는 처음부터 말도 안되는 계획이었다. <세계정치론> 번역과 교열을 계속 진행했다. <연민의 굴레>가 끝이 났다. 다시 K를 만났고, 그와 <인도양문명사> 이야기를 했다. 민망했지만, 무언가 기대했던 작은 꿈을 하나 이룬 기분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생각하면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테제를 음미했다. 1987과 1989. 자유민주주의의 외부를 쉬이 상상할 수 없는 나는 항상 '몰락'만을 경험했다는 생각을 했다. 9.11이 10주년이 되었다. 지금 나의 인생을 어느 정도 '결정'했던 사건. 강렬한 토마호크 미사일의 섬광. 그 후 10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가? 내가 왜 지금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졸업 논문 주제를 정했다.

    10월. 오랜만에 학교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연애시대>와 <Once> OST가 어울리는 가을이었다. B가 하께 살자는 제안을 했다. 지하철을 오며가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진지하게 읽었다. 나는 항상 이반을 동경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성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살아가는 알료샤를 동경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절대로 알료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이 졸았다. 인민의 '아편'을 만든 S가 사라졌다. 

  O에게 안 좋은 일이 일이 있었다. B와 J와 각자의 삶에 대해 평가를 내려주었다. 공통적으로 2008년이 그 기점이 되었다는 점이 신기했다. 장기 2008년은 계속된다. 나에게 이후의 삶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슬레이어즈>를 보면서 이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단 한 명에게 걸 수 있는 '희망'에 대해 생각했다. 카다피가 죽었다. 시작보다 중요한 것은 끝이다. 

  11월.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세계가 만들어져 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미 말해진 것이라면, 과연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J가 나에게 던지는 커다란 질문이었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왜 나는 지금 당장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까뮈는 말할 것이다. 의미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C가 많이 아파서 수술을 해야만했다. 1500. 다른 P가 결혼식을 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았고, 광화문과 종로를 K와 걸었다. 가을비인지 겨울비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비가 왔다. 항상 그렇듯 중간고사는 못 봤고, 과제들은 여전히 미리미리 하지 못했다. 시험기간만 오면, 컨디션은 최악인 것은 여전했다. 이 와중에 졸업 논문 주제가 통과되었고, 이제 나의 마지막 학부 2학기가 마무리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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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카다피

2011/10/21 02:57 from 雜_앓음다움.



   무아마르 카다피(1942.6.7-2011.10.20)가 드디어 전투 중에 사살되었다. 튀니지 청년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시작된 중동 민주화 과정 속에, 한 지도자는 망명길(튀니지)을 떠났고, 다른 지도자는 법의 심판(이집트)을 받게 되었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결국 10월 20일을 기점으로 자신의 시간을 영원히 빼앗기게 되었다. 말년의 그가 보여준, '중동의 미친 개'로서의 카다피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리비아의 젊은 청년 카다피가 꿈꾸었을 세계에 공감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를 위한 글을 하나 쓴다.

   1942년, 카다피가 가난한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리비아는 이탈리아의 속국이었다. 리비아는 1952년 유엔 결의안을 통해 독립을 했으나, 세누시 왕조의 이드리스 왕(1951-1969)이 통치하던 리비아는 혼란 그 자체였다. 1911년부터 1945년까지 이탈리아 제국의 식민지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명한 롬멜의 전차전의 무대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리비아. 유엔 결의안으로 법적인 식민지의 지위로부터는 벗어났지만, 1959년 리비아에서 발견된 '검은 황금'은, 다시금 리비아를 서구 세력들의 새로운 식민지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이드리스 왕은 무기력하기만 했고, 막대한 석유 이익의 떡고물은 리비아 국민이 아닌, 몇몇 외세와 결탁한 매판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린 카다피는 가족들로부터 이드리스 왕이 아닌, 이탈리아를 상대로 전설적인 게릴라 전쟁을 벌인 우마르 무크타르. 소위 '사막의 라이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사막의 라이온을 좋아했던 어린 소년은, 머리가 커지면서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혁명철학'을 읽었고, 이집트 정부가 전 아랍을 향해 송출한 '아랍의 소리' 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며,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다.

   1965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카다피는 영국에서 사관 연수를 받고 있었다. 마침 영국을 이드리스 국왕이 방문했는데, 의장대로 이드리스 왕과 영국 수상의 만남을 지켜본 카다피는 이드리스 왕이 영국 수상에게 굽실거리면서, 리비아의 이권을 팔아먹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한다.



  이 사건 이후, 카다피는 고국으로 귀환하여, 나세르의 선례를 따라 장교들을 조직하여, 1969년 9월 1일 국왕이 신병 치료 차 터키로 떠난 틈을 노려, 이드리스 왕의 리비아를 무너뜨렸다. 그의 나이 27살 때의 일이었다. 반외세, 반굴종, 사람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외친 그의 목소리는 전세계에 울려 퍼졌다. 서구식 대의민주주의도, 이슬람 원리주의, 소련식 마르크스주의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없는 사상이라고 보았던 청년 카다피는, 모든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자마힐리아' 체제를 고안해냈다. 카다피의 생각에 공감했던 수많은 리비아 청년들은, 카다피의 녹색책을 한 손에 들고, 자마힐리아 체제의 토론에 참여했다. 몇몇 사람들의 손에서 결정되던 정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국유화된 석유로부터 얻어지는 수입은 인민들의 복지에 사용되었다. 몇몇 왕족들의 사치에 쓰였던 리비아의 국부는, 리비아를 넘어 카다피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아프리카 해방, 아시아 해방을 외치는 수많은 단체들에게로 흘러들어갔다. 넬슨 만델라를 지원한 것도 카다피였다.



  항상 '대위'의 칭호를 달고, 리비아 혁명을 지휘한, 한 때 중동의 체 게바라라고 불렸던 청년 카다피. 결국 다른 많은 3세계 혁명가들처럼, 그의 최후는 '체 게바라'로서가 아니었고, 그가 꿈꾸었던 '아랍의 나폴레옹'이 아닌 우스꽝스러운 '나폴레옹 3세'로서 끝이 났다. 하지만 카다피 1인의 주도로 시작되었던 1969년 리비아 혁명은, 40년의 시간을 지나 수많은 리비아의 '청년 카다피'로 하여금, 2011년 리비아 혁명이 더욱 더 나아갈 수 있게 했다.  청년 카다피가 외친 것처럼 역사의 주인은 한 사람의 왕이 아니라, 민중들이었다. '리비아 자마힐리아'는 카다피의 녹색 책이 아니라, 2011년 리비아의 거리와 사막 속에 있었다.


  리비아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 우마르 무크타르, 청년 카다피가 꿈꾸었을 '새로운 리비아'를 만들어내시길. 이번 내전으로 3만 이상의 큰 희생을 치른 그들의 상처를 애도하면서, 리비아의 미래에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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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2011/07/21 12:22 from 雜_앓음다움.


만성 저혈압과 빈혈을 앓고 있다.
매 여름 장마가 끝난 무더위 이 맘 때 쯤이면 나는 거의 좀비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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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비판

2011/05/31 03:22 from 雜_앓음다움.
'아이폰'을 위시로 한 스마트폰은 21세기 인민의 '아편'이다. 동방예의지국은 이제 아편으로 가득 찼다. 스마트폰은 1초의 무료함도 견디지 못하는 안타까운 피조물들의 한숨을 먹고 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우리는 새로운 아편전쟁을 준비해야한다. 그 때 나는 임칙서가 될 것이다.
- ㅇ.ㅊ.ㅈ(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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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자

2011/03/11 11:49 from 雜_앓음다움.

모든 사람이 두 눈을 뽑아버린다면, 자본주의는 붕괴할 것이다.

우리는 눈이 멀겠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눈을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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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2011/02/14 12:27 from 雜_앓음다움.

 요즈음 나는 외국어 관련 일을 하느라고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하나는 <Relentless Revolution>이라는 영어책의 후반부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매 주 프랑스어로 300자 남짓의 글을 쓰는 것이다.


  나는 이번 번역 일 전에도 간단한 번역 업무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감각 유지'를 위해 매 달 적어도 한 권 정도는 영어 원서를 읽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비문을 찾는 교열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나서서 번역 일을 맡으니, 지금까지 내가 번역이라는 작업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어로 쓰인 글을 술술 어느 정도 뜻을 파악하면서 읽는다는 것과 번역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나는 1급 통역사처럼 영어 글의 핵심을 잘 짚어서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1급 번역사처럼 번역투가 아닌 아름답고 유려한 한글 문장으로 바꾸어내고 싶었지만, 이는 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영어로 생각을 할 수 없다. 영어는 한번도 나의 삶 속에서 한국어의 지위를 위협한 적이 없다. 영어는 그냥 꽤 잘하고 어릴 때부터 익숙한 외국어일 뿐이다. 그렇기에 매번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 번역하는 문장의 뜻은 알겠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오묘한 느낌이나 필자 개인의 독특하고 미묘한 문체까지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가끔 번역하는 문장과 번역된 문장의 미묘한 균열이 생기게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러한 번역들이 모여 설령 오역은 아니더라도, 독자의 이해를 방해한다는 점에서 번역을 맡은 이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는 아직 내 능력 밖인 것을!


  이와 비슷한 반대의 경우도 발생한다. 나는 요즈음 매 주 프랑스어로 200-300자 남짓의 사회과학적 에세이를 쓰고 있다. 다른 친구들이 대개 빠르게 쓸 수 있는 '고시체'를 고집한 반면, 나는 아름답고 정확한 프랑스어를 쓰고 싶었다. 매주 좀 익숙한 표현을 쓰기 싫어서, 프랑스어 홈페이지가 잘 되어 있는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나, 프랑스어 기사체의 최고봉 르몽드, 프랑스 엥포, 유로뉴스 등에 들어가서 그들의 표현을 흉내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프랑스어가 구속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프랑스어 역시 항상 내 바깥에 있었고, 나는 프랑스어로도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프랑스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 프랑스어 구사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하루는 '21세기 유엔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나왔다. 평소에도 많이 생각해 본 주제였지만, 막상 한국어로 하루 종일 떠들 수 있는 주제가 나오니, 프랑스어로 표현하는 것이 난망해졌다. 생각한 크기와 표현된 크기가 너무나도 불일치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그것을 모두 다 프랑스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글이 아니라, 좋게 봐주어도 하나의 기사일 뿐이었다. 아무런 주장도 없었고, 단순한 사실만을 기록한 쓰레기글이었다. 내가 프랑스어로 쓴 이 글을 읽어본다는 것은 얼마나 맞갖잖은 것인지!


  결국 나는 그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적으로 목도하고, 나의 부족함을 깨달으면서 불안감이 엄습해들었다. 결국 영어나 프랑스어는 내가 제일 친숙한 외국어인데, 이것조차도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로 표현이 가능한 내 생각만 말하고 쓸 수 있다면... 결국 남들(외국인)이 보는 것은 내 생각의 깊이가 아니라, 그것이 발화된 형태일텐데.... 너무 화가 났다. 간단한 회화 이런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프랑스어 하나도 못해도 돈만 넉넉하다면 파리에서 평생을 살 수 있다. 대도시의 삶은 현재 세계 어느 도시나 비슷하다. 다만, 내 생각을 영어나 프랑스어로 100% 혹은 영어와 프랑스어의 묘미를 살려 101% 까지 표현을 하지 못하는 내 상황에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능력을 연마한다 하더라도 영어로 <순교자>의 김은국이나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성복 교수, <담론과 해방>을 쓴 김경만만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작업을 프랑스어로 한 루시앵 골드만이나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야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그 사람들은 동유럽의 조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 유년기를 둘러싸고 있던 언어는 오직 한국어 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절대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건 내 운명이다. 성인이 돼서 배운 언어로도 문학사가 기록할 만한 아름다운 글을 쓴 사람들이 물론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예외적인 재능과 열정을 지닌 사람들이다. 내게는 그런 재능과 열정이 없다. 그것 역시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내 운명이다.


  나는 대학시절에 몇 개의 외국어를 배웠다. 너무 넓게 벌여놓아 깊게 배운 언어는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노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지만, 아무튼 그 시절에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즐거웠다. 대학 입학 전에 사회의식의 과잉으로 평등의 언어 에스페란토어를 친구와 함께 열심히 공부했고, Skype를 이용해서 세계 각국 에스페란티들과 인터넷 대화를 열심히 하기도 했었다. 대학에서는 서양 중세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중세의 보편 언어인 라틴어와 아랍어를 배웠다. 물론 이제는 문자를 읽는 정도 수준에 그치지만, 남들이 잘 쓰지 않는 '죽은 언어'인 라틴어와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생소한 아랍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매우 짜릿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에스파냐어에는 멕시코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한 3개월 쯤 푹 빠져 지냈다.


  이런 저런 언어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한 가지 언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말들의 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다 보니, 어느 새 사회가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까? 요즈음 나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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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을 하나 조홍진이 보기에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하다가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훗날 사람들은 김일환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기억하고 일부 사람들은 김일환이 실제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지 않았었냐고 진술한다.


배문형


  내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다고 전제한 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냐 못 넣으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이 나에게도 보편적 준칙으로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이냐는 것이다. 혹은 '무지의 베일' 속에서 과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먼저라고 주장한다. 옆에는 피터 싱어의 <동물 윤리학>이 밑줄 친 채로 놓여있다.


배문형(술이 조금 들어감)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자본 구성의 고도화 때문이라고 말하며 흐느낀다. 200년 뒤면 세상은 질적으로 달라져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옆에는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놓여있다.


뉴질랜드 다녀온 배문형
 

  코끼리가 사랑에 빠진다면 냉장고에 흔쾌히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오학준


  자신은 '학부생'이라고 소개한 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고대 물리학부터 근대 자연과학 혁명, 양자역학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전제한 후 이를 줄줄 설명하나 아무도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종국에는 최신 담론들을 원용하며 '코끼리적인 것'과 '냉장고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l'elephant이 아니라 la elephante라는 신조어까지 소개한다) 조홍진이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묻자 집이 멀다고 먼저 나가면서 훗날 블로그에 정리해서 글을 올린다고 약속한다. 어느날 블로그가 갑자기 폐쇄된다. 


  그리고 훗날 <그날이 오면> 앞으로 <코끼리적인 것과 냉장고적인 것 : 발터 벤야민의 판타스마고리아>이라는 긴 서평이 제출된다. 오학준은 2등상을 수상한다.


조홍진


  앞의 논의들을 조목조목 비판한 후, 모두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서는 담론보다는 먼저 20대가 현실적으로 사회세력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대를 조직화하기 위해 진두에 나서나 별다른 호응이 없다. 어느 날 녹두에서 '나만 따르면 되는데...역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중얼거리며 취해 있는 조홍진이 핸드폰을 쥔 채 발견된다. 


문병준


  현재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지 못하는 이유는 대중들이 무식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그래서 어떻게 대중을 계몽시킬 수 있냐고 물으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만 읽으면 답이 다 나와있는데, 그건 너가 이해하기 어려우니 우선 플라톤의 <국가>부터 꼼꼼이 읽고 오라고 한다. 


옥창준


  문병준의 말까지 들은 후, 그 자리에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 심적으로 문병준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 보이나, 모두에게 티를 살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집에 가서 역사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코끼리를 실제로 냉장고에 넣은 사례가 있는 지 알아본다. (이슬람 지역의 문헌은 반드시 본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블로그에 거대한 정리글을 쓰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올라온 글은 "코끼리와 냉장고는 다 근대 서구적 개ㅋ념ㅋ" 딱 한 줄.


차지연


  아이폰을 이용해 '코끼리를 어떻게 냉장고에 넣지?'ㅋㅋ란 글을 트위터에 올린다. 이를 보고 달린 수많은 재치있는 댓글과 리트윗을 보면서 재밌어하다가 정작 자신 앞의 질문을 잊는다. 근무하러 돌아간다.



꽁트는 꽁트일 뿐...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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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

2010/12/29 00:28 from 雜_앓음다움.

  송년회때마다 친구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 '이제 우리도 꺾인다'라는 표현이다. 잘 납득이 안 되지만, 내년이 토끼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나도 (한국 나이로) 이제 스물 다섯이 된다. 주변에서는 이제 우리도 노땅이라고 푸념이지만, 나는 그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2년 전 스물 셋이 될 때도, 친구들은 이제는 'ㅅ 받침 나이'―스물 셋,넷,다섯,여섯―가 된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찬찬히 따지고 보면 스물 셋 이후에 '경륜'(?)이 쌓이면서 그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들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나이 스물 다섯이 아니라, 스물 다섯 살에 걸맞는 나이값을 제대로 못하는 것일테다. 2010년을 준비하면서 나는 오이디푸스 왕을 인용하며 2010년에는 오만(hubris)을 범하지 않기를 염원했다. 이 다짐 중 이룬 것도 있고 못 이룬 것도 있지만, 적어도 2010년 그 전보다 오만함이 줄어든 것은 확답할 수 있다. 나의 '장기 2009년'이 끝나는 2011년은 스물 다섯살이라는 나이값에 맞는 직무를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해낼 수 있는 해가 되길 바란다. 


2010년 꼬다리 날 중, 스물 다섯살을 자축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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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을 닫으며

2010/12/22 22:35 from 雜_앓음다움.

  

  그리고 나는 수학을 연구할 때 흔히 갖게 되는 정신의 자유에 따라 이 학문의 주제들을 연구하기 위해, 인간 행동을 조롱하지도 한탄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오히려 인식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나는 정념들, 가령 사랑, 미움, 노여움, 질투심, 야심, 측은한 마음, 그리고 마음의 여러 동요들을 인간 본성의 결함으로서가 아니라 고유한 성질로서 관찰했다.


―스피노자, 정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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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2010/10/29 12:32 from 雜_앓음다움.

  누군가 나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나는 답했다. 그걸 알면 내가 왜 사냐. 모르니까 살지. 만약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공자가 말했듯, 나는 죽어도 좋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내가 죽는 순간까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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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나는 글을 별로 쓰지 않았다.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나만의 비밀블로그를 만들어두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한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것이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시기에 생각을 바로바로 표현하지 않고 천천히 소화하고 성숙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만저만 소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이와 같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아마 내 생각과 성격의 중대한 변모에는 많은 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 변모의 기원이라 할까, 혹은 적어도 이 변모를 겪게 된 과정을 설명하려면 과거로 약간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으로 벗의 소개로 홍세화의 책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읽은 2003년 겨울로부터, 나는 인생의 목적이라 할 만한 것을 세울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기성세력과 싸우고 더 나아가 세계의 개혁자가 되는 것이었다. 나 자신의 행복은 이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보다는 사회를 치료하고 개혁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정말 이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내가 의지할 참되고 영속적인 개인적 목적은 오로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 행복을 영속적인 그리고 먼 장래의 그 어떤 것으로 두고, 또 이 어떤 것이 언제나 얼마간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그것이 완전히 성취되어 끝나는 법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하고 내가 누리고 있던 행복의 확실성 역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나는 흐뭇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이런 상태가 몇 해 동안은 그대로 잘 지속되었다. 이것은 그 당시 사회의 일반적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또 이 개혁을 촉진하는 데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분투하고 있다는 들어서 내 생활이 제법 생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듯 이런 생각에서 깨어날 때가 왔다. 그것은 2006년 가을이었다. 나는 온 신경에 맥이 빠진 상태였다. 이것은 누구나가 가끔 빠지는 상태이다. 즉 재미있는 일이나 신나는 일에 무감각한 상태, 다른 때에는 재미있는 것이 시시하고 싱거워 보이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한번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네 인생의 목적이 모두 실현되었다고 가정해 보라. 네가 추구하고 있는 제도와 사상의 변화가 지금 이 순간 모두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라. 이것이 네게 큰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겠는가?” 그런데 억누를 수 없는 자의식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되자 내 마음은 깊은 수심에 잠겼다. 내 삶을 받혀주고 있던 기초가 전부 무너졌다. 내 모든 행복은 이 목적을 계속 추구하는 데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이 목적이 이제는 그만 매력을 잃은 것이다. 어찌 다시 새삼스레 그 수단에 흥미를 가질 수 있으랴? 이제 위하여 살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듯싶었다.


처음에 나는 이 구름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져 버리겠거니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인생의 자질구레한 근심 걱정에는 최선의 약이 되는 밤의 잠도 내 괴로움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이 비통한 사실에 대한 의식이 다시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누구하고 만나든 또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이 의식이 따라다녔다. 단 몇 분만이라도 이것을 망각케 하는 힘을 지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원래의 활동들을 접고, 내가 좋아하던 책들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였다. 즉 내가 언제나 힘과 용기를 얻었던 과거의 고상하고 위대한 사람들의 기념탑인 그들의 글에서 내 괴로움과 슬픔을 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책들을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혹은 습관이 된 감흥은 있었으나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류에 대한 내 사랑과 뛰어나게 훌륭한 일을 그 자체 때문에 사랑하는 일이 다 닳아버렸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내 느낌을 남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만일 가슴 속의 슬픔을 꼭 털어 놓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면, 나는 이러한 상태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또 내 고민이 흥미 있는 것도 못 되고 어느 모로나 존경할 만한 것도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을 나를 의아하고 또 일부는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실 ‘열심히’ 살고 있는 그들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부모님 역시 응당 내가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이었으나 모든 점으로 보아 그들은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신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또 그것을 이해하게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준 가르침은 결국 이와 같은 결과가 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그의 계획이 실패하였고, 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하여 괴로운 생각을 품게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친구들 가운데서도 내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는 주변에 없거나 내가 그들에게 의지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이 정신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하여 생각하면 할수록 소망은 사라졌다.

 

이렇게 된 인생이 도무지 살 보람이 없다는 데 대해서 나는 누구보다도 강한 확신을 품었다. 나는 이상과 같은 것이 인간성의 법칙들이요, 이 법칙들로 해서 내가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내가 존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인류에 대해서 동정함으로써 생기는 쾌감과 남의 이익, 특히 인류 전체의 이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감정이 행복의 가장 크고 확실한 원천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진리라고 확신하였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감정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이 감정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내 교육은 결국 이상과 같은 고귀한 감정을 분석의 해체시키는 힘에 대항할 만큼 충분히 강하게 내 마음 속에 생기게 해주지는 못했고, 한편 내 지적 수양의 전 과정은 조숙하고 미숙한 내 분석을 내 정신의 뿌리 깊은 습성이 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항해를 떠나자마자 암초에 걸렸다고 혼자 중얼거리게 되었던 것이다. 배는 잘 정비되고 키도 있으나 돛이 하나도 없었다. 매우 용의주도하게 계획을 짠 것이 이제는 단점이 되었다. 장차 일하려 했던 것에 대하여 진정한 욕망이 전혀 없었다. 덕이나 전 인류의 복지에도 아무 흥미가 없고, 이 밖에 다른 어떤 것에도 아무 흥미가 없었다. 허영과 야심의 샘이, 자애심의 샘과 완전히 내 속에서 고갈해버린 듯싶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한 것이지만 나는 너무 어렸을 때에 허영심의 만족을 얼마간 얻은 바 있었다. 남보다 뛰어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대한 욕망이 자라서 정열이 되기에 앞서, 나는 이미 얼마간 남보다 뛰어났고 또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양 느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내가 성취한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너무 일찌감치 성취되었기 때문에 너무 손쉽게 얻은 모든 쾌락처럼 추구하는 데 싫증나고 또 무관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기적인 쾌락이나 비이기적인 쾌락이나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쾌락도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성격을 다시 새롭게 형성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분석적인 된 정신 속에 새로이 인간적 욕망의 다른 어떤 대상에도 쾌감의 연상을 결부시킬 수 있는 힘이 자연 안에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상과 같은 것들이 2006년에서 2007년으로 넘어가는 우울한 겨울철의 메마르고 무거운 낙심의 감정에 뒤섞인 생각들이었다. 이 동안이라고 해서 일상의 업무를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저 습관의 힘으로 기계적으로 일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나는 기왕에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일에는 아주 잘 훈련이 되어 있어서 내 정신이 그 일에서 아주 떠나있을 때에도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나는 2006년 겨울부터 신입생맞이준비위원장(신짱)을 했고, 총학생회, 그리고 2008년 11월까지 반 학생회와 학회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마 내 경우가 나에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교육의 특수성은 이 일반적으로 있는 현상에다 하나의 특별한 성격을 더해주었다. 나는 혼자 자주 자문했다. 만일 인생을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만 한다면 도대체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하고. 이 물음에 대해서 대체로 나는 이렇게 1년 이상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자답하였다. 그런데 그 1년이 절반도 채 못 가서 가느다란 빛발이 내 마음의 어두운 그늘에 비치었다.

 

2008년 5월 우연히 이창동의 <밀양>을 보게 되었다. 타지에서의 허영기로 인한 자식의 유괴와 죽음, 그리고 용서의 힘을 신으로부터 도난당한 신애. 교도소 앞에서의 실신은 세속의 ‘어긋남’을 보여준 사건이자 신애의 나르시시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나르시시즘의 균열 이후 몸부림치는 신애를 보면서 나는 그 고통에 오롯이 감정이입이 될 수 있었다. 영화관을 나올 때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부터 내 짐은 차차 가벼워졌다. 모든 감정이 내 마음 속에서 잘못된 교육 때문에 죽어버렸다는 생각의 중압이 가셨다. 이제 나는 다시 소망 없는 자가 아니었다. 그저 나무뿌리나 돌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도 나에게는 모든 인격의 가치와 행복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남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줄곧 나를 사로잡았었으나, 이제는 그런 느낌에서 해방되어 그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평범한 사건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나가는 순간들의 즐거움을 깨닫고, 나 스스로가 슬픈 일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한 것 역시 나로서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 다음에야 나는 햇볕과 하늘과 바위, 책, 담론, 공공의 일에서 강렬하지는 않아도 유쾌한 마음을 품게 하기에 충분한 즐거움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사상을 위하여, 사회의 복리를 위하여 진력함으로써 이전보다 온건한 것이기는 해도, 마음이 약동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맛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구름은 차츰 걷히고 나는 다시 인생을 즐겼다. 그리고 비록 여러 번 어두운 심적 상태로 돌아가는 때도 있었고, 그 중 몇 번은 여러 달 계속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내 사상과 성격에 두 가지 아주 두드러진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나는 전에 내 행위의 준칙으로 삼았던 것과 아주 다른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까지 나는 세상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스스로 선의 편에 서고자 했다. 그리고 선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생의 목적이 흔들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인생을 선과 악이 아닌 기쁨과 슬픔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은 없다.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행복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전에는 목표를 위해 진력하고 전진하고 있을 때 그 결과물로서 행복이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행복을 목적으로 삼지 않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웠다. 자기 자신의 행복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 다른 사람들의 행복, 인류의 진보 혹은 어떤 예술이나 추구를 행복의 수단이 아닌 오히려 그 자체 이상적인 목적으로서 추구하는 데 전심하는 사람들만이 행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행복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목표 삼는 가운데 자연히 행복은 따라오는 것이다. 인생의 여러 가지 향락을 인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 취할 때, 비로소 그것들은 인생을 즐거운 것이 되게 하기에 족한 것이다.


여러 가지 향락을 인생의 주요 목적으로 삼아보면 쉬 그것들은 인생을 유쾌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날카로운 이성적 검토를 피해갈 수 없다. 그대가 행복한가 안한가를 스스로 자문해보라. 그리하면 그대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행복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대의 자아의식, 그대의 검토, 그대의 자문자답을 그 목적에 집중해보라. 그리하면 다른 점에서 행복한 상태에 있는 한 그대가 호흡하는 공기와 함께 행복을 들이마시게 될 것이다. 행복을 밤낮 꿈꾸고 거기 대하여 여러 가지 궁리하지 않아도, 상상 속에서 잔뜩 벼르거나 까다롭게 따져서 그만 놓치지 않아도 행복은 저절로 올 것이다. 이제 이런 생각은 내 인생의 한 기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것이 향락에 대한 감수성과 능력을 보통 정도로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즉 인류 대다수를 위한 최선의 생각이라고 믿는다.

 

이 시기에 내 사상이 겪은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내가 처음으로 개인의 내적 교양을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집중한 것이다. 나는 이제 외부의 환경을 정돈하는 것과 그들의 시선 때문에 사색 및 행동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나는 이제 경험에 의하여, 수동적인 감수성이 능동적인 여러 능력과 마찬가지로 계발될 필요가 있으며, 또 이끌어져야 하고, 또한 가꾸어지고 풍부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한 순간도 내가 전에 깨닫고 품었던 진리를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즉 나는 결코 지적 교양을 업신여기지도 않았고, 분석의 힘과 실제로 분석하는 일이 개인과 사회를 개선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라는 생각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적 교양이나 분석에는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여러 가지 결과가 따르기 때문에, 그와 함께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수련을 더하여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여러 가지 능력 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러 가지 감정을 배양하는 것이 내 윤리적 및 철학적 신조의 주요한 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내 사상과 취미는 무엇이든지 이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 될 수 있어 보이는 것으로 날로 더욱 향하였다.

 

나는 이제 예술이 인간적 교양의 방편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책에서 읽거나 사람들에게 들은 것들이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 알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의 일이었다. 여러 가지 예술 가운데서 내가 어릴 때부터 아주 좋아한 것은 음악뿐이었다. 음악의 최선의 효과는 열정을 북돋우는 데 있다. 즉 인격 속에 이미 있는 고귀한 감정들을 더욱 높은 가락으로 끌어 올리는 데 있다. 이때의 흥분은 이 감정들을 더욱 높은 가락으로 끌어 올려준다. 이 흥분은 잠깐이지만 다른 때에도 이 감정들은 내내 존속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음악의 이러한 효과를 나는 자주 경험하였다. 그러나 쾌락에 대한 내 모든 감수성과 한 가지로 그것도 내 정신의 고뇌의 시기에는 중단되었다. 나는 음악에서 숨 돌릴 곳을 거듭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곳을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마음속의 밀물이 방향을 바꾼 후, 회복 과정에 있을 때, 나의 회복은 음악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 도움은 전보다 훨씬 미미한 것이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다. 그 절묘한 선율에서 내가 얻은 말할 수 없는 쾌감은 그 전처럼 느낄 수 있는 쾌락의 원천을 보여줌으로써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위로도 음악의 쾌락이라는 것이 익숙해짐에 따라 희미해지고 또 얼마 동안 듣지 않다가 다시 들음으로써 흥미를 새롭게 하거나 혹은 계속하여 새로운 가락을 첨가함으로써 흥미를 돋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음률의 결합이 결국은 다하여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심각하게 번민한 것은, 그 당시의 내 상태나 또 생애에서 시기의 정신적 경향을 아주 잘 드러내는 것이었다.

 

내 생활에 무슨 결함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필시 인생 자체의 결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문제는 만일 사회와 정치의 개혁자들이 목적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 신체적 안락을 누릴 수 있다고 하면, 인생의 여러 가지 쾌락은 이제 분투와 결핍에 의하여 줄곧 추구되지는 않게 되겠기에 그만 쾌락이기를 그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일 인류 전체의 행복에 대해서 이보다 나은 어떤 희망에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내 낙심은 반드시 계속되리라고 나는 느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길을 찾을 수 있는 날엔 기쁨에 넘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인류 전체의 운명을 조금이라도 함께 나누어 걺어지고는 스스로 만족하리라 느꼈다.

 

내 사상과 감정이 이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접한 것은 내 일 생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나는 그저 호기심에서 그의 책을 읽었고, 거기서 무슨 정신적 위안을 얻을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우울이 극도로 달했던 시기에 나는 미셀 우엘벡의 <소립자>를 읽었다. 이것은 남보다 강렬한 필체로 그 특유한 세계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는 우엘벡이 내 마음 속에 어떤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가 없는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짐작한 바와 같이, 나는 우엘벡의 소설에 감탄했지만, 도리어 역효과만 얻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미셀은 너무나 나와 비슷하였다. 그의 비애는 모든 쾌락에 지쳐버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또 인생의 좋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생이란 내가 본 바와 같이 싱겁고 맥 빠진 것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싶은 사람들의 비애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묘사한 68세대들의 육욕이나 이부동생 브루노와 같은 사람들의 공허와 우울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반면 빅터 프랭클은 나와 꼭 맞았다.

 

거기 실린 여러 사건들은 내 여러 감수성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의 하나, 즉 전원의 풍물과 자연의 경치에 대한 사랑을 힘차게 호소하였다. 이 사랑은 나에게 인생의 쾌락의 대부분을 주었을 뿐더러, 또한 최근에 내가 다시금 가장 오랫동안 침울한 상태에 빠졌을 때, 나를 위로해주었다. 전원의 아름다움이 미치는 이러한 힘 속에 빅터 프랭클이 제시한 ‘로고테라피’가 있었다. 매일 서쪽 하늘에 지는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탄성을 지른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그의 방법은 감정을 수양시키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게 하였다. 바로 이것이 내가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글에서 나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환희의 샘 또는 공감과 상상의 기쁨의 샘이 솟아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 샘은 모든 인류가 함께 나누어 마실 수 있는 것, 분투나 불완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그리고 인류의 물질적 사회적 상태의 개선에 따라 더욱 풍부하게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글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고요한 명상 속에 참되고 영원한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그는 인류 공통의 감정과 공통의 운명에서 도피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를 직시하고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고요한 명상 속의 행복을 누릴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런 종류의 수련을 쌓는다면 아무리 분석의 습관이 굳어졌어도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나는 차츰 그러나 완전히 내 습관적인 우울증에서 벗어나 다시는 빠지지 않게 되었다.

 

내 생애 이 시기를 설명함에 있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종의 전환점이 되고 내 사고 방식에서 명확히 진보를 이룬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인상들만을 적었다. 그러나 이렇게 몇 가지 인상만을 추려서 적으면 이 전환기의 여러 해 동안에 내가 무수한 문제에 관하여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가에 대해서 아주 불충분한 관념을 주게 된다. 그 때 내가 생각한 문제의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 가운에 내가 기왕에 믿지 않았거나 중시하지 않았던 것들을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재발견은 나에게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었고, 많은 진리를 터득케 했다. 그리고 이때의 진리들은 재래와 같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 그 원천에서 막 흘러나온 참신한 것이었다. 또 이러한 재발견이 있을 때마다 거의 언제나 이 진리들은 어떤 새로운 빛 속에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빛으로 인해서 그것들이 비교적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내 초기의 여러 사상 속에 있던 진리들과 절충되었고, 또 이 진리들을 어느 정도 수정하면서 확인해 주는 듯싶었다. 그러나 한편 초기의 이 여러 사상은 어느 때나 그 본질적인 면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내 모든 새로운 생각은 내 초기 사상의 기초를 더욱 깊고 더욱 튼튼하게 해주었다. 또 한편 그것은 여러 가지 사상을 그릇된 결과로 나아가게 하는 오해와 혼란을 자주 제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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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출근길. 수많은 차들이 각각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여러 곳을 출발한 자동차들은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각자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모든 자동차는 각자 나름의 이기적인 목표를 지니고 움직이는 셈이다. n개의 자동차와 n개의 목적지가 있음에도 매일 아침 출근길의 큰 사고는 대개 열 손가락을 넘지 않으며, 대개 통근길 교통은―다소 막히기는 하지만―원활하게 이루어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애덤 스미스라면 도로의 신호체계―표지판, 신호등, 교통경찰 등―를 언급하면서, 이 체계에 따라 행동하는 운전자들의 행동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즉 각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신호체계에 따라 반응을 확실히 한다면, 별 다른 무리 없이 사회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구성원들의 가장 빠른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고, 심지어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까지 하다!

 

  위와 같은 상황을 경제학적 상황에 비유하자면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자들의 결론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미시경제학 교과서도 그렇고, 이제는 서점가 스테디셀러가 되어있는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의 생각도 그러할 것이다. 신호체계는 곧 가격체계이고, 소비자는 가격이 너무 비싸면 사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생산자는 정확히 그 반대로만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한다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자동적으로 ‘파레토 효율’이 달성된다.

 

  이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생각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우선 윤리학자이기도 했던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따라 이와 같은 주장이 가능하다. 운전자는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공명정대한 ‘양심’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운전자가 최고제한속도 60km/h 인 도로를 주행하고 있다고 하자. 단, 이 도로는 감시카메라가 없다. 이런 도로를 주행하고 있는 운전자는 단순히 ‘신호체계’이기 때문에 제한속도 60km/h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제한속도의 제정 의의와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고려하면서 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확장시키면 최근의 정치학이나 사회학, 경제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사회자본론’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사회자본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신뢰와 배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사람들의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지만, 절대적인 사익의 추구는 어느 정도 통제되어야 하고, 어느 정도 패자부활이 가능할 정도의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자본을 많이 확보한 사회일수록, 우리는 최종적으로 더 안전하고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를 다시 교통 체계에 비유하자면, 일종의 교통에 대한 시민의식이나 질서의식에 대한 연구가 될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사회자본론’의 연구 취지에는 동감하지만,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연구가 기껏해야 주류 경제학에 대한 ‘보완재’ 정도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완전정보를 가정한 주류 경제학의 공리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비판이 이제는 ‘불완전정보 하의 선택이론’으로 미시경제학에 편입된 것처럼 말이다.

 

  아직 교과서로 편입되지 못한 비판의 방향으로는 주류 경제학의 기본 공리에 대한 근본적(radical)인 비판들이 있다. 즉 다른 말로 ‘호모 이코노미쿠스’에 대한 비판이다. <유한계급론>의 베블런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인류학적 시각을 도입한 <아파트 공화국>의 발레리 쥘레조, 게임이론을 연구하는 산타페연구소,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최정규가 하고 있는 작업들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사실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스스로를 돌아보자. 과연 나는 실제로 주류 경제학의 가정처럼 ‘예산 제약 하의 효용 극대화 달성’을 위해 살고 있는가? 혹은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가?

 

  당연히 우리 대부분은 일상생활에서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살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공리처럼 효용극대화와 비용극소화의 미분-기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비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의미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미 주류 경제학의 공리 자체는 이와 같은 반증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일종의 규제적 이념(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볼 때 주류 경제학자들의 가정한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공리는 사실 일종의 ‘유토피아’에 가까운 개념이다. ‘완전경쟁’ 개념도 그러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미학적으로 아름답기까지 한 ‘일반균형’의 개념도 그러하다. 이 두 개념은 유토피아라는 뜻이 그러하듯이, ‘현실적’으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미래를 구상하는 유토피아 개념이 지금-여기에서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사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어도 본질적으로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판이다.

 

  오히려 내가 관심을 더 갖는 부분은 일종의 자기 충족적 예언처럼 주류 경제학자들의 믿음이 ‘구성’해나가는 현실의 모습이다. 다시 교통 체계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최근 요 몇 년 간 내비게이션을 단 자동차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이제 많은 운전자들은 지도가 아니라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여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은 실시간 이동경로를 표시해주고, 나름의 기계적 연산과정을 거쳐 정밀한 최적화 작업을 수행한다. 아직까지 물리적인 최단 거리만을 연산할 정도의 기술이지만, 조만간 목적지까지 가장 안 막히고 실질적인 최단 거리를 계산해내는 기술이 현실화될 것이다. 즉 인간은 미분-기계로 행동하지 않지만, 기술과 기계의 도움을 받아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분-기계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보급도 궁극적으로는 정보로의 접근 비용을 현저히 떨어뜨려 인간을 주류 경제학이 가정한 완전정보상태에 가깝게 만들어줄 것이다.


  즉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하는 것은 총체적인 생산관계로서 자본주의이든, 기업사회이든, 기술-자본 복합체든 우리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누구나 호모 이코노미쿠스처럼 행동하게 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물신주의, 경영학과 자기계발 담론의 열풍,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고사 등 이미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는 징후들은 너무나 많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일종의 기계적 판단만을 하는 동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가정을 섬세하게 검토하고 비판해왔다. 이러한 비판적 작업들이 과연 먼 미래에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아직까지 확답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에 부정적이다. 예전 현실사회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적 인간'의 비현실성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대답은 이랬다. "아직 혁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사회주의자들의 논리는 우리 시대에도 그래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도 이 세상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유토피아'로 전진해나가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그들의 비판적 논의는 의도한 것과 달리 결과적으로 주류 경제학의 외연을 넓히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주류 경제학들의 공리에 대한 현실성/비현실성의 논의보다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현실의 '디스토피아'의 측면이다. 즉, 가시적으로는 3D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의 장착이 과연 진정한 ‘유토피아’의 방향인지를 되묻는 것이다. 


  다시 운전에 대한 비유로 돌아가자. 본질적으로 운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운전은 단순히 목적지로의 도착을 기준으로 평가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운전은 목적지로의 도달뿐만 아니라, 가는 길 옆 자리 좌석 사람과의 대화, 주변 풍경에의 감상, 사소한 운전 실수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경험에 가깝다. 과연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의 장착이 이와 같은 경험의 깊이와 폭을 넓혀줄 수 있을 것인가? 누구 말처럼 내가 철지난 계몽주의자여서 그럴지 모르지만, 나는 목적지를 입력하고 그 길을 의도하지 않게 따라야 하는 내비게이션보다, 내 스스로 길을 구상하고 그려보고 상상할 수 있는 3000원짜리 꾸깃꾸깃한 도로교통지도를 절대적으로 더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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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원의 여행

2010/06/22 01:49 from 雜_앓음다움.

1. 

일과는 밤 10시 반에 끝난다. 또 다시 하루를 살아남은 나는 그제서야 무거운 의무의 짐을 내려놓는다. 나는 짐을 꾸리고 이제는 ‘대학동’으로 공식 명칭이 바뀐 신림동을 떠날 채비를 한다. 대학동이란 다소 인공적인 이름보다는 한자 뜻 때문인지, 울림소리 때문인지  나는 ‘신림’(新林)을 발음할 때 연상되는 초록 빛깔의 느낌을 좋아했었다. 신.림. 신.림.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뇌의 뉴런에 초록색 잎사귀가 연상된다. 그러나 이름과 실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때 나무로 가득한 숲이었을지 모르던 이 동네는 이제는 생명력 없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동네가 되었다. (그렇다고 '대학'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 동네에 오래 있다간 내 좋은 기가 다 빨려들어갈 것 같다.

2.

서둘러 
152번 버스에 몸을 싣는다. 900원이 찍힌다. 버스는 신림동을 출발하여 신림역, 노량진을 거쳐 시청으로 향한다. 노량진과 그 뒤로 보이는 고층빌딩들을 '완상'하는 일은 재미있는 경험이다. 이는 인구 천만 메트로폴리탄의 특권이다. 재수학원에서부터 고시학원까지 정말 '학원'으로 가득한 노량진은 마치 요지경 속을 보는 것 같다. 한국이 아니면 세계 어디서 이런 진귀한 풍경을 볼 수 있을까! 11시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길가에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낯빛은 한없이 어두운 그들은 하루의 무게를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저들은 어떤 꿈을 꾸고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노량진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그들을 꾸역꾸역 삼켜버린다. 총을 한 방 맞은 좀비같은 그들 뒤로 63빌딩과 트럼프 월드가 보인다. 작은 개천이 해자라도 되는 듯 '노량진'과 '여의도'는 너무나 다른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한 공간이 욕망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곳이라면, 한 공간은 욕망이 실현되고 실시간으로 거래되는 곳이다. 한 공간은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요지경이라면, 그 뒤는 화려하면서도 차가우리만큼 깔끔하다. 63빌딩은 사실 욕망으로 넘실거리는 서울의 '남근'이 아닐까라는 음란한 상상을 해본다. 남근들이 만들어내는 어두운 그림자는 노량진을 짙게 드리운다.

3.

노량진에서 고가 차도를 타면 바로 한강이다. 원거리 통학(혹은 통근)의 즐거움은 매일 한강을 지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한강이 없는 서울은 상상만해도 질식할 것만 같다. 다리 위에서 올려다본 한강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강은 친척이신 최창규 대령이 한국 전쟁 당시 이 한강 다리를 폭파할 때도 흐르고 있었고, 조선 시대, 아니 암사동에서 신석기인들이 뛰어놀때도 흐르고 있었다. 강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들의 삶의 행태는 달라졌을지언정, 그 본질은 여전히 미물일 것이다. 하루종일 칼날을 갈려고 노력한 스스로를 반성해본다. 한강의 입장에서, 우주의 입장에서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나 자신을 대단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는가? 부분적이며 상대적인 내 견해를 옳다고 단정짓지 않았는가? 심지어 한강에 비치는 여의도의 모습까지도 여의주처럼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저 멀리 다리 건너 고속터미널과 그 뒤에 있는 건물들, 건물들 사이의 골목, 골목 사이에 있던 공기와 냄새, 그리고 추억들을 조용히 응시한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작은 불꽃 같은 편린과 감정들은 넘실거리는 검은 한강에 내려둔다. 달팽이관에 MP3가 만들어내는 작은 전자음이 입력된다.

4.

한강을 건너 남대문 근처에서 버스를 갈아탄다. 환승이라 다른 요금이 들지는 않는다. 172번 버스는 상암 DMC를 출발하여 신촌을 지나 서울광장, 종각역, 창덕궁, 창경궁, 혜화역을 통과하는 버스다. 이 정도면 적어도 나에게는 환상의 노선이다. 172번 버스가 상암과 신촌의 기억을 묻어온다. 신촌과 상암. 둘 다 나와 기억의 실이 촘촘히 이어져 있는 공간이다. 버스를 타고 노선도를 바라본다. 파란 색의 실이 충정로, 이대를 통과하여 신촌까지 이어져 있다. 이 버스가 마치 별자리를 잇듯, 인연의 끈을 이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버스 안에 남아있는 공기 중에 신촌의 것도 있을 지 모른다.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서울광장 근처 촛불 시위 때 자주 가던 편의점이 보인다. 시위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서울광장에서 밤을 지샐 때 저기에서 먹은 컵라면은 참 맛있었다는 생각이 먼저 난다. 예전이라면 깜짝 놀랐겠지만, 이제는 저런 '작은' 기억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스스로를 타박하지는 않는다. 버스는 이미 종각을 통과한다. 종각에 와서야 이제 내가 아는 서울에 온 듯 한 느낌이 든다. 익숙한 서점의 간판이 보이고, 모든 게 다 친근하다. 인사동과 정독 도서관 입구. 순수하고 솔직하고 부끄러운 기억들로 가득하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추억이 켭켭히 쌓여있는 공간을 매일 어깨너머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물론 이 곳도 몇 년 사이에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 맛있는 전과 빈대떡을 팔았던 피맛골은 사라지고 지금은 주상복합 르 메이에르가 들어섰다. 저 건물은 내 기억마저 앗아가버렸다. 분명히 피맛골이 있던 자리임은 분명하나, 이전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5.

헌법재판소가 보이는 재동 입구를 지나,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로 지른다. 구보씨가 보이기도 하고, 김옥균, 박규수의 사랑방이 보인다. 울창한 나무들과 적당한 높이의 담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을 자아낸다. 낮은 담 뒤로 조선 왕들의 궁궐이 보인다. 멸망당한 왕국의 궁은 처연하다. 오직 궁궐만이 남아 그 시대를 쓸쓸하게 증언하고 있다. 종묘는 경건하지만 죽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기분이 다소 쓸쓸해진다. 푸른색 버스가 우울하게 보인다. 
대학로다. 저 멀리로는 북한산이 보인다. 지세가 험준한 관악산보다 바위가 많은 북한산은 그 존재만으로도 포근하다.  그나마 시끌시끌한 이 곳에 오면 다시 활기를 찾는다. 노량진의 청년들과는 달리 이 곳 청년들은 열정과 들뜸이 느껴진다. 앞에 탄 연인들이 조잘거리는 게 시끄럽지만, 싫지는 않다. 각자 어떤 이야기와 사연을 갖고 있을 지 궁금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저 연인의 삶이 앞으로 '명사'보다는 '동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길 희원하면서 버스에서 내린다.


6.

집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버스 103번을 기다린다. 유엔 헌장 103조. 유엔 헌장의 조문은 여타 조약 상의 규범보다 우선한다는 조항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면서 다른 버스들과 조문을 연결시켜본다. 101번. 103번. 105번. 젠장 다 1번으로 시작하잖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유엔 헌장이 떠오른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아직도 환승이라 돈이 더 찍히지 않는다. 이제 아주 조금만 더 가면 우리 집이다. 가장 짧게 버스를 탔을 뿐인데, 내릴 때 300원이 더 찍힌다. 바뀐 버스의 요금 체계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300원이면 버스 여행의 후불 요금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한다. 휘향찬란하지만 외로운 도시, 누구도 제 삶의 주인이 아닌 도시, 너무나 빨리 변하는 도시, 보이지 않는 도시를 통과하여 나는 왔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 여름이지만 밤공기는 제법 차다. 그렇게 내 여행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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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want your children to become communists, send them to study in a capitalist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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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리토스

2010/05/26 12:33 from 雜_앓음다움.

  주말에 쉬엄쉬엄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유물론자는 아니지만, 데모크리토스가 그의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논증을 통해 신화로 세계를 설명해오던 방식은 종말을 맞이하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우주 개념은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강요된 질서나 진리도 없으며, 로고스나 목적 및 우리 친구들이 즐겨 사용하는 '의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운명,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 죽은 뒤에도 살아남는 영혼 같은 관념들이 모두 사라졌다. 나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설명모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데모크리토스를 보며, <소립자>를 쓴 미셀 우엘벡을 떠올린다. 우엘벡 역시 '서양문명의 말기'를 '물질주의'로 이름붙이고 그의 논의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에 따르면 모두가 칭송해마지 않는 자유의 혁명인 68혁명은 성적 영역에까지 투쟁 영역을 확장시켰으며, 68세대가 표방한 가치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반대해마지 않던 물질주의로 귀착되어갔다. 68의 집단운동은 역설적으로 극도의 개인주의적 욕망들로 가득차 있었고, 그들이 표방한 낭만주의는 지독한 물질주의로 귀결되었다.

  항상 나는 데모크리토스나 우엘벡과 같은 논지 전개방식에 일종의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데모크리토스가 세계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atom)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생각해냈고 우엘벡이 원자화된 인간을 넘어 소립자화된 인간의 모습을 잔인하리만큼 섬세하게 그려낸다면, 홉스는 인간 세상을 논하면서 더이상 쪼갤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을 상정하고 그의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홉스가 생각한 개인의 삶은 고독하고 비참하고 외롭고 잔인하며 짧다. 오로지 남는 것은 개체의 '자기 보존의 욕구'뿐이다. 최근에 간간히 읽기 시작한 법학자 칼 슈미트는 홉스의 논지를 받아들이며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고 단언한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충격적인 동시에, 그 솔직함에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魔力)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식의 흑마법 앞에서 나는 머뭇거린다. 흑마법을 받아들이고 살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가 지식의 치유마법과 창조마법을 배울 것인가. 데모크리토스를 읽다가는 소크라테스를, 관자와 한비자를 읽다가는 공자를, 마키아벨리를 읽다가는 그로티우스를, 홉스를 읽다가는 루소를, 칼 슈미트를 읽다가는 롤즈를, 도킨스를 읽다가는 최정규를 읽었다. 아직 창조마법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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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2010/04/04 19:06 from 雜_앓음다움.

  오늘은 부활절이다.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교회 아주머니께서 주신 전단지를 받았다. 그 전단지 한 켠에는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소개되고 있었다. 부활절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큰 관련이 있는지는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참고로 소개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이란,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개로 수천명의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을 말한다. 


  고등학교 때 독서실을 같이 다니는 친구와 함께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둘이서 신나게 비웃었던 기억이 났다. 그 때는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식으로 비판을 했었다. 수천명이서 오병이어를 먹는다고? 참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그 때는 텍스트 자체의 자구 하나에 집착했고, 텍스트 상 아주 작은 허점이라도 보이면, 전체가 말이 안된다는 식으로 생각했었다. 


  나이를 좀 먹고 스스로를 반성해보니,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전체적인 저자의 논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우선 거기에 맞추어 텍스트를 읽으려는 해석이 우선 필요할 것 같다. 비판은 그 후의 몫이다. 물론 너무 비판적 독해를 강조하다가 텍스트 자체를 사상해버리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이고, 호의적 해석을 한답시고 텍스트 자체에 빠져버리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시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본다. 다섯개의 빵, 물고기 두 마리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한 기적을 예수가 행했다는 것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수천명의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 양보하고,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결국 전체가 다 함께 살 수 있었다는 것 아닐까. 


  내 나름대로 해석한 '오병이어의 정신'이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오병이어의 정신이 좀 더 퍼지길 소망하며, 부활절을 내 나름대로 기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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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

2010/03/16 14:40 from 雜_앓음다움.

  이건 친구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강남 ‘텐프로’ 룸살롱은 1시간에 40만원, 신촌 키스방은 1시간에 10만원, 홍대나 북창동 안마방은 2시간에 10만원, 노래방 알바는 1시간에 8만원. 그리고 대부분 이러한 곳에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사 성행위가 이루어지거나, 속칭 ‘애프터’가 이루어진다.


  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롭지만, 한편 마음 한편이 매우 불편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의 성이 상품가치로 환원되어 거래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성매매 행위에는 매우 복잡한 사회적 맥락이 존재한다. 물론 나도 전해들은 것이라 확인할 수 없고, 또 그들의 발화행위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지 않은 (유사)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그런 의식을 지니지 않고 있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그들을 비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꼭 그런 일을 선택해야 했냐고 다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어쩌면 나의 윤리적 비판 역시도 그들이 보기에는 ‘공자님 말씀’처럼 공허한 것은 아닐까? 왜 그녀들은 그런 일을 택했을까? 명품 핸드백에 눈이 멀어서? 아님 돈의 노예라서?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현 시대에 사회적 약자들이 오로지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옳은 방식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예가 극단적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성의 상품화는 그야말로 우리의 삶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있다. 남성적 시선에 기반을 둔 여성의 상품화는 이제 너무나 진부한 레토릭이 되었고, 이제는 여성들도 트와일라잇, 짐승돌 신드롬에서 보이듯, 남성들의 성적 매력을 자유롭게 구매하고 향유한다. 호스트바 업소도 호황을 누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노동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그러한 기회가 여러 가지 제약 조건으로 인해, 주어지지 않을 때 권리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천박한 상품화를 거부하고 올곧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의 삶은 훌륭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모든 개인이 노동할 권리가 있지만, 현실에서 그 권리가 구현되지 못한다면, 그/그녀는 그저 착한 방식으로만 자신의 길을 찾을 수는 없다. 권리를 당당하게 찾거나 쉽게 찾을 수 없을 때, 다른 대체물을 확보하는 것은 노동권을 가진 그의 몫이고, 그 상황이 극한으로 몰릴 때, 그가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을 상품으로 내놓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지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 역시 없어 보인다. 소위 좋은 대학교를 다니던 사람이 정말 극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때, 자신의 몸을 학원이나 과외에 파는 것과 위에 언급한 것들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히 상품화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 너무 많으며, 오히려 그런 비판은 ‘공허’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품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사리 예단할 수 없지만, 그 출발점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상품화에 밀리고 치이고 내던져진 주변부, 일부 반주변부 인생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조건 아래에서 자신의 마음 한 조각이나 몸뚱이를 상품으로 내던져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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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그룹 삼국지

2010/02/18 01:20 from 雜_앓음다움.

  때는 명박 2년 봄. 중원의 경제 위기와 역병에 대한 공포로 촛불족의 난이 전국 방방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민심을 읽지 못한 한나라는 촛불족의 난으로 한 칼에 무너질 것처럼 보였지만, 호로관보다 뚫기 어렵다는 명박산성의 축조와 신무기 물대포의 등장, 여기저기에서 나타난 의용군인 ‘걸 그룹’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촛불족의 난을 진압하고 목숨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미 민심은 한나라를 떠나가고 이 후 ‘걸 그룹’들은 한나라를 대체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걸그룹 할거의 시대'―걸웅할거―라고 부르게 됩니다.


중원의 소녀시대


  현재 여러 걸 그룹 중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것은 ‘소녀시대’입니다. 소녀시대는 중원의 명문인 SM 가문 출신이죠. 그러나 소녀시대의 시작은 생각보다 그리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데뷔전인 <다시 만난 세계> 전투는 소녀시대 지지자들에게는 소녀시대가 긴 수련기간 동안 쌓아온 내공(발차기!)을 아낌없이 보여준 전투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이를 SM 가문 출신으로는 어느 정도 당연스런 결과였다고 고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후 소녀시대는 여러 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키싱유> 전투,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역병이 중원에 창궐해서, 다시 민심이 어지러워졌을 때, 소녀시대의 장수 태연이 단독으로 지휘한 <만약에>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중원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하북의 원더걸스


  하지만 소녀시대에게 가장 중요한 전투는 역시 <지Gee> 작전이었습니다. 그 시점과 전략이 매우 절묘했지요. 그 전까지 중원의 패자에 가장 가까웠던 걸 그룹은 또 다른 중원의 명문가 JYP 가문 출신 ‘원더걸스’였습니다. 원더걸스는 중원 중심에 치우쳤던 소녀시대와 달리 하북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텔미>, <쏘핫>, <노바디> 전투에서 연속적으로 승전보를 울리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07년과 08년 즈음 중원을 관찰한 역사가가 이후 원더걸스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더라도 과도한 해석은 아니었죠. 08년 즈음에, 중원 최고의 서원인 서울 서원을 원더걸스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여러 지체 고귀하신 유생들이 하던 공부까지 멈추고 서원 앞마당까지 쏟아져 나와 넘어지기까지 했던 것은 그들의 강대함을 보여주는 웃지못할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지 대전


  소녀시대의 세력도 나름 강대했지만, 상대적으로 원더걸스의 국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었습니다. 소녀시대는 항상 칼을 갈며 현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SM가문과 JYP가문의 대를 이어 계속되는 대결도 그 둘의 경쟁에 일조했습니다. 09년 1월, 드디어 그 때가 왔습니다. 스스로 중원의 패자로 생각한 원더걸스가 서방의 야만족을 정복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원정을 떠난 사이, 소녀시대는 비밀리에 <지> 작전을 개시했습니다. 원더걸스의 주축 세력은 대부분 원정을 떠나있던 상황, 그야말로 소녀시대는 별다른 유혈 없이 북방을 평정합니다. 이것이 정정당당하지 못한 빈집털이가 아니냐는 중원 유림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중원 민심의 중요한 바로미터인 관군은 소녀시대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고, <지> 작전은 결국 소녀시대의 압도적인 승리로 추인됩니다. 이후 소녀시대는 명실공히 중원의 제 1 패자가 됩니다.


원더걸스의 쇠퇴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던 원더걸스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중원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야만족에게 발이 묶였죠. 여러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중원의 강자 <조나스 브라더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쉽게 야만족을 평정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원더걸스는 야만족의 족장의 신발에 머리를 조아리는 등 충격적인 패배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이 충격으로 원더걸스 군의 명장 선미가 책임을 지고 하야했다는 소문도 있죠.) 속설에 의하면 현재 원더걸스 군은 진을 치고 전열을 정비한 채, 중원 이외의 곳에서 새로운 장수를 찾아 (이미 야만족 장수를 영입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녀시대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강동의 2NE1


  두 번째 세력은 비옥한 강동 지역에 나름대로의 세력을 구축한 '2NE1'입니다. 2NE1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빅뱅 강’입니다. 이름만큼이나 중원에서 가장 크다는 빅뱅 강은 도도하게 강동 지역을 감싸 안고 흐르면서 중원의 패자 소녀시대의 침공으로부터 2NE1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2NE1의 중원 진출을 어렵게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해석하면 강동 지역에는 고정적인 2NE1 지지층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09년 이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2NE1이 이렇게 클 수 있었던 것은 2NE1 장수 개개인의 출중한 능력도 있지만 대부분 빅뱅 강이라는 천혜의 조건과 강동의 책사 테디의 뛰어난 민심 파악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원더걸스를 <지> 작전으로 무너뜨린 소녀시대와 달리 강동에서 착실히 성장한 2NE1은 소녀시대와 달리 평화를 사랑하는 '아티스트'라는 후광이 덧씌워졌고, 이 역시 그들의 성장에 일조했습니다.


아이돈케어 대첩


  이 두 세력이 정면으로 맞부딪힌 것은 09년 여름이었습니다. 이 때는 <지> 작전의 대성공으로 중원을 평정한 소녀시대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른 시점이었죠. 동시에 2NE1이 <롤리팝>과 <파이어> 전투로 강동을 평정하면서, 소녀시대의 잠재적 도전자로 등장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소녀시대 진영은 빅뱅 강을 우회하여 중원을 통일할 계책을 고민합니다. 이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녀시대 진영의 책사는 소녀시대의 변신을 제안합니다. 지금까지 소녀시대를 지탱해왔던 소녀 이미지로부터의 탈피를 주문한 것입니다. 이 때 고안된 작전이 바로 <소원을 말해봐> 작전입니다. 기존의 소녀시대의 전략―후크 전략, 소녀 이미지 전략―으로부터는 이탈한 신 개념의 작전이기도 했죠. 이 작전의 고안자는 이 방법을 통해 기존의 소녀시대가 아우르지 못했던 사람들―노골적으로는 빅뱅, 2NE1의 지지자들―까지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 때 소녀시대의 진영의 병준이라는 책사가 소녀시대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는 소녀 이미지의 탈피도 중요하지만, 적어도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남자친구> 작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투서했지만 묵살됩니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작전은 초반에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티저 작전 공개 때만 해도 천하 통일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죠. 천혜의 장애물이던 빅뱅 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NE1은 원더걸스처럼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2NE1의 책사 테디는 소녀시대에 대항하여 <아이돈케어> 작전을 구사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YJ 가문의 전술이었죠. 그러나 소녀시대 진영은 이를 너무 어렵게 해석했고,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당해 스스로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민심은 <소원을 말해봐>를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소녀시대에는 이를 대체할 새로운 작전이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죠. (문인 병준의 예측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이 둘의 첫 대결은 소녀시대의 판정패로 끝나게 됩니다.


신야의 카라와 서량의 브라운아이드걸즈의 등장


  소녀시대 진영은 나름대로 퇴각하던 도중 야인 박명수의 등용을 통해, <냉면> 작전을 구사하고 <초콜릿 러브> 작전을 수행하면서 겨우 체면치레를 하지요. 하지만 이 작전도 그리 오래 가지 못 합니다. 기존까지 소녀시대가 자신의 상대로도 여기지 않던 듣보잡 '카라'라는 그룹이 <워너>와 <미스터>를 이끌고 나타나서 소녀시대 군을 혼비백산하게 하는 가 하면, 어디서 이상한 갈색 머리를 한 야만족 기병대가 나타나서 괴상한 소리를 외치면서 보병 중심의 소녀시대군을 무너뜨렸습니다. 이후 <소원을 말해봐> 작전을 진두지휘 혹은 이끈 태연 장군의 위신이 다소 하락하고, <냉면> 작전을 지휘한 제시카 장수의 영향력이 무척 커졌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제시카 장수의 친동생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밀 부대 F(X)를 이끌고 있다고도 하지요.


소강상태와 틈새전략

 

  09년 여름의 전투 이후, 두 진영은 일시적 평화상태를 맞이합니다. 소녀시대는 소녀시대 나름대로 자신들의 팬을 추스리며 세력을 정비했고, 2차례에 걸친 콘서트 투어를 하기도 합니다. 2NE1도 질세라, <11번가> 전투, <카스> 전투, 박봄 장군의 <유엔아이> 작전을 구사합니다. 두 진영 모두 나름의 성과를 거둡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력이 고착화되면서 두 진영 나름의 약점이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소녀시대는 판정패 이후에도 중원 제일의 세력이지만, <소원을 말해봐> 작전 실패 이후, 이미지 쇄신이나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매번 책략가 켄지가 고안해내는 비슷한 작전을 변주하게 됩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소녀시대의 행동이 큰 위기를 맞고 있지 않지만, 몸집 큰 공룡이 위기를 맞았을 때 쉽게 몸을 틀지 못하는 것처럼, 항상 성공만 해왔기에 그 성공의 신화에 오히려 발이 묶여 한번의 위기가 오면, 쉬이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소녀시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2NE1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나름대로 이름을 알렸지만, 과연 그들이 강동 지역 패권이 아닌, 중원을 통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는 지는 아직도 미지수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아티스트라는 후광도 여러 학자들의 치밀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책략가 테디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가 문제지요. 앞으로 변신에 있어 소녀시대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한 그들이 어떤 매력을 발산할지, 귀추가 매우 주목됩니다. 


  이런 양강 구도 속에서 다른 여러 걸 그룹들이 난립하면서, 틈새시장 공략과 세력확장에 정력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걸 그룹들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라졌죠. 몇 몇 눈에 띄는 현재 눈에 띄는 군웅들을 살펴보자면,


서량의 브라운아이드걸스


  서량은 본디 이민족과의 교류가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그룹의 이름은 '브라운아이드'걸스입니다. 이들은 보병중심의 소녀시대와는 전혀 다른 기마 전술을 구사합니다. 오히려 방법에 있어서는 2NE1과 닮은 점이 더 많지요. 장수 개개인의 능력도 출중한 편인데, 이는 소녀시대, 2NE1과 달리 자수성가한 잘난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됩니다. 이들이 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한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이름을 널리 떨치지 못했는데, 최근에는 <아브라카다브라>라는 새로운 마법 전술을 개발하면서 중원 북부를 어지럽히고 있어 소녀시대의 견제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남만의 애프터스쿨

 

  남만의 애프터스쿨 역시 매우 특이한 세력입니다. 이 세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중원의 국가와 그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뚜렷한 지도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매번 지도자가 바뀌고, 때로는 전쟁을 치르던 장수를 쫒아내기도 하고, 전쟁 도중 장수를 타 세력으로부터 영입해오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도 어느 정도 평등한 권력배분이 이루어지는 매우 특이한 조직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이 지역의 명문가 '히어로즈'의 후예 유이 장군 등용에 성공했는데, 유이 장군이 기존 세력들보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자, 진영 내부에 불편한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세력 자체는 확대되었지만, 유이 장군에게로 권력이 편향되어 있는 이 세력이 과연 내부 갈등을 이겨낼 수 있을런지요.


요동의 포미닛


  원더걸스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다는 것은 미리 전술했습니다. 요동에는 옛 원더걸스 에서 하야한 현아가 세력을 유지하고 원더걸스와 전략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현아 장수를 필두로 거병한 것이 바로 '포미닛'입니다. 이 세력도 <포미닛> 전투를 통해 어느 정도 세력의 기반을 마련했으나, 압도적으로 현아 장수 1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은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도 현아 장수는 포미닛 이란 이름보다도 현아란 이름으로 어필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이 세력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줄런지요. 그리고 언젠가는 있을 원더걸스의 중원 진공 작전 때 포미닛 세력은 어떤 포지셔닝을 하게 될 지 궁금합니다.


교지의 티아라


  가장 늦게 거병한 신군주 티아라는 아직 확고한 세력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보핍보핍> 작전은 브아걸의 <아브라카다브라> 작전과 더불어 틈새시장 공략의 성공작으로 손꼽히죠.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1위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아직까지 여러 장수들의 이름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애프터스쿨이나 포미닛처럼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장수가 돋보이지 않는 만큼, 앞으로 조커 장수를 하나 영입하든지, 내부적으로 성장시켜야 할 듯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티아라가 SM과 JYP, YJ와 같은 명문 집안의 후손은 아니지만, 상당한 지방 유지의 후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야의 카라


  카라 세력도 중원에서 나름대로 힘을 지닌 세력 중 하나입니다. 굳이 세력 분포를 따지자면, 소녀시대 - 2NE1 의 뒤를 잇는 세력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천하삼분지계를 논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것이 카라의 현주소입니다. 인구나, 세력 측정의 핵심지수로 평가되는 '음원력', '1위력', '지명력'에서 앞의 둘과 한참 차이가 나죠. 심지어 1위력의 기록은 아직까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신군주 티아라한테도 밀리는 실정이지요.


  하지만 카라의 힘은 뛰어난 '성장 능력'에 있습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카라는 예전의 명문집안인 DSP가문 출신이라고 합니다. (예전의 명문이었다는 말처럼, 현재는 상대적으로 하락한 집안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몰락한 집안 출신으로 거병을 꿈꾼 카라는 열심히 실력을 길러 <Break it>으로 데뷔전을 치릅니다. 나름대로 DSP 집안 출신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Break it> 작전은 대실패로 끝이 납니다. 노래 제목대로 카라 세력이 'break it' 됩니다. 뛰어난 전투능력을 지녔던 장수 김성희가 하야했고, 카라 세력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립니다. 이 위기를 막고 카라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카라의 뛰어난 장수 한승연은 비상체제를 선언하고, DSP의 후예라는 자신의 신분도 훌훌 던져버리고, 어떤 고된 일도 거절하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훗날 한승연은 이 때 한듣보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다른 걸 그룹의 군주들이 민중들의 사랑을 받으며 호의호식을 누릴 때 한승연 장군은 장군의 신분으로 산적과 결판을 벌이기도 했고, 민중들이 즐겨하는 놀이인 스타크 판에 찾아가서 만담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소소가백이라는 당시 유행하는 한시 경연대회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한승연 장수가 나서 모범을 보이자, 뒤이어 그럴 것 같지 않았던 규리 장수, 니콜 장수도 민심 장악에 손수 나섭니다. 특히 니콜 장수는 자신의 특기인 야만족의 언어를 이용해 사전을 편찬하면서 중원 민중들의 외국어 습득 욕구를 해소시켜주기도 하였고, 몸소 동물들을 치료해주시겠다면서 건국 서원에 입학하기도 했습니다. 카라 장수들이 민중들과 즐겨 어울린다는 소식이 저잣저리에 퍼지면서 카라 장수들은 서서히 민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곧이어 SM 가문의 방계 출신인 구하라 장수가 카라를 구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영건 강지영 장수도 영입되었습니다. 기존의 4인 체제에서 5인 과두 체제로 카라가 개편되면서 카라 내부의 정치 상황도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카라의 앞길은 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저잣거리에서 민심을 얻었어도 카라는 쉽게 안정적인 거점을 마련하지는 못했습니다. 카라가 저잣거리 민심을 살피면서 실시한 <Rock U> 전투도 카라의 멸망을 막았다는 나름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카라는 결국 <지> 작전 이후 중원에 불어온 소녀시대 광풍에 밀리면서, 중원의 거점을 포기하고 이곳 형주의 작은 성 신야로 내려오게 됩니다. 막 이름을 알릴 수 있었지만 소녀시대의 명성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죠. 이후 신야성을 거점으로 뛰어난 제식을 연마하여 <Pretty Girl> 전술을 개발했꼬, <Honey>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면서 형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나름대로 세력을 중원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던 워너와 미스터 사이에서 확실한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하면서 자신을 완전히 '대안 세력'으로 민중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도 <하니> 작전 이후 펑펑 운 한승연 장수의 일화는 수많은 민중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고 이 당시 수많은 민중들이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카라에게는 나름의 희망이 있습니다. 다른 여타 꼬꼬마 그룹들과는 달리 카라는 어느 정도의 명성을 쌓아두었으며, 지지하는 민심 역시 두텁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정처없이 유랑하면서 방황했지만, 그만큼의 생존 능력도 많이 터득했습니다. 아마 카라의 이번 <루팡> 전투는 카라의 행보에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루팡과 천하삼분지계


  <루팡> 전투는 시기적으로 매우 좋은 시점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소녀시대가 <지> 작전을 계승한 <오> 작전을 개시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고 이를 대내외로 과시하고 있는데, 이에 2NE1이 <날따라해봐요> 기습 작전으로 추임새를 넣으면서 소녀시대와 국지전 전투를 치루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전문가를 이 전투는 소녀시대의 승리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2NE1이 강동을 수성할 수는 있겠지만, 소녀시대 패권을 결정적으로 뒤흔들수 있는 재목이 아니라는 점이 어느 정도 경험적으로 입증된 상황인 것입니다. 카라가 기존 소녀시대와는 다른 전략으로 틈새 시장을 공략한다면, 카라가 소녀시대의 대항마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나 소문이 중원에 널리 퍼지게 될 것입니다.


  소녀시대와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에서 카라가 언급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구력면, 경제력면, 전투력면에서 밀리는 카라는 이득이 됩니다. 변신에 있어서 소녀시대보다 자유롭고, 아티스트라는 칭호로부터도 자유로운 카라는 좀 더 쉽게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선 지금 시점에서는 카라로서는 어느 정도 확실한 연고지를 마련해야 합니다.


  <루팡> 전투는 그런 의미에서 옛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생각한 익주 진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카라 지지자들이 현재 소녀시대의 <오>와 카라의 <루팡>을 품평하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아주 신중치 못한 태도입니다. 오히려 현재 시점에서 카라가 목표로 해야하는 것은 <워너> 작전과 <미스터> 작전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나마지 세력들에 대한 확실한 평정입니다. 이번 작전에서 위에 언급된 여러 세력들 중에서 그래도 카라가 제일 낫다라는, 민심을 얻거나 제 3 세력의 리더로서 카라가 부각 된다면, 카라는 자연스레 유의미한 소녀시대의 경쟁자로 상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현재로서 소녀시대와 맞서서 전혀 승산이 없습니다. 하지만, 카라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면, 똑같은 전술에 의존하는 소녀시대에 맞서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여러 카라 팬들의 숙원인 북벌은 그 때 가서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힘들게 자수성가한 카라는 소녀시대가 상대적으로 지니지 못한 높은 '덕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낱 서생에 불과한 저는 이 재미있는 판국을 보면서 여러 세력들의 명성을 찬찬히 평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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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아끼는 그림은 바로 위에 있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1818년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다. 내가 어떤 이유로 이 그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 고민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나는 항상 높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와 같은 현상을 그의 책 <공간의 시학>에서 ‘왕자적 관조의 위치’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이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오는 쾌감은 마치 왕이 자신의 왕국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만족감이기도 했고 저 넓은 미지의 세상을 바라보면서 오는 정복욕의 소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완전한 설명이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게 된 좀 더 심층적인 원인이 있을 터이다. 여러 다층적인 원인이 있고 그 만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현재까지 내가 생각한 원인은 이러하다. 우선, 나는 철이 조금씩 들기 시작할 때부터 내가 항상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생각해보면 뭐 부잣집 아들도 아니고, 딱히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끼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스스로를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공부를 항상 그럭저럭 잘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는 수능이나 중고등학교 내신의 객관식 문제풀이를 뜻한다. 나는 뛰어난 암기력을 지닌 것도 출중한 이해력을 지닌 것도 아니었지만, 객관식 문제풀이만큼은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큰 어려움 없이 ‘성적’이라는 권력과 권위를 남들보다 쉽게 얻었다. 한국 사회의 특성상, 공부를 잘 한다는 것, 아니 성적이 잘 나온다는 것은 플러스 요인이 되면 플러스 요인이었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소위 성적이 나쁜 애들이 누리지 못한 여러 특권을 누렸고, 그 결과 남들이 말하는 좋은 고등학교에도 남들보다 쉽게 진학할 수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는 중요한 시기에 ‘좋은’ 고등학교에 간 것은 나의 삶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회에서 좋은 고등학교란 성적에 목매고 한 문제 차이에 목숨을 거는 아이들이 많은 ‘정글’을 뜻한다. 나 역시 고등학교 초반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성적에 대한 부담감과 집착은 심해졌다. 이루어내는 게 많을수록 잃어야 할 것도 많아졌다. 나중에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 경쟁을 위한 경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죽음으로 치닫는 치킨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풀고 있는 시험 문제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도, 어차피 한 번 보고 나면 다 까먹을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열심히 공부해서 항상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가 되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인재가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국가를 위한 인재임을, 기업을 위한 인재가 되라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난 별다른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김진표의 ‘학교에서 배운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어차피 1년만 참으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면서 하루하루 문제를 푸는 생활을 계속했다.


  1년 동안 비슷한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나 역시 어느 순간 변했다. 나도 모의고사나 시험과 같은 한 방 승부를 즐기게 된 것이다. 재밌지 않은가? 딱 하루의 시험으로 학생의 인생이 판결을 받는다니? 이건 공부가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는 러시아 룰렛이었다. 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내 주변의 친구들도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이 자신들을 모의고사 성적으로 차별하는 것에는 거품을 물면서도 우리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여자상고생들을 정말 대놓고 무시하는 행태는 정말 역겨운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바쁘게,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살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남들을 무찌르고 정상에 올라서 본 광경은 아비규환이었고, 너무나도 허무했다.


  그럴수록 정말 더 큰 공부(大學)를 하고 싶었다. 문제풀이는 절대 공부가 아니라 학습, 아니 반복기술에 불과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이렇게 부질없는 활동에 잃어가는 것이 싫었다. 이런 노예같은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큰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에 진심으로 가고 싶었다. 대학에 와서 정말 큰 공부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우선 답을 유보해두고 싶다. 하지만 몇 가지 증언과 단편적인 인상을 남겨두고자 한다.


  우선 현재의 대학은 '대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전만 해도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들어오면 몇년동안 실컷 자유롭게 노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화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학에 들어와도 한국 고등학교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노예적 문화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다.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지를 찾지 못한 대학 새내기들은 대학에 들어와서도 방황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아니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시장-요구하는 수업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들어야만 한다.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생각해도 '큰 공부'란 학점을 위한 공부도 아니고, 토익/토플 공부도 아니고 새내기 때부터 시작하는 취업준비나 고시준비도 아니다. 오히려 낭만과 지성이 어우러지면서 자유롭게 진리와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공부를 하는 이를 쉬이 찾기는 어렵다.


  나는 고등학교에 이어 또다시 반복되는 레파토리인 정상에 끊임없이 올라가라고 떠미는 경쟁구조에서 개인적으로 탈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많은 것을 잃기도 했지만 또 많은 것을 얻었다. 대학에 와서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들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마음이 맞는 벗들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내가 주로 즐겁게 공부한 과목들은 전공인 사회과학 쪽이기도 했지만, 주로 인문학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지성의 바다를 바라보면 '왕자'였던 나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 내가 얼마나 외롭고 조그만 존재로 있는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이해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지, 무한한 억만 겁의 시간 속에서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얼마나 짧고 덧없는지, 이에 반해 사람의 무지란 얼마나 거대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한 명의 '방랑자'일 뿐이었다.


  이걸 깨닫고 나는 절망했는가?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많은 날을 괴로워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더 시니컬해졌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우리 인간이 별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실 세상 어떤 일이 와도 심지를 굽히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사실 인간사의 대부분의 일들이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마음이 무척 편안해졌다. 마음 속에 항상 존재하던 피해의식도 누그러졌다.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다보니 한국 사회가 강요하기도 했고,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하기도 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였던 '정상'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니 새로운 고원이 보였다. 비록 손꼽을 만한 인생의 클라이맥스도 없고, 사람들이 좋아라하는 다이나믹한 인생도 아니지만, 나의 삶은 나름대로 평온하고 그동안 놓치고 지나갔던 여러 즐거움들을 깨달았다.


  물론 그 기회비용은 크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적어도 공부를 하면서 조금 더 자유로운 인간에 가까워졌다. 난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돈이 최고다'라고 외치는 사람도 주변에 많고, '영어 하나만 잘하면 끝난다'라는 생각으로 그것에만 매달려사는 사람도 많다. 정말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다. 그러니 뭐 인생의 의미가 어떠니, 삶이란 무엇이니, 자유란 무엇이니 이러고 사는 건 솔직히 말해서 피곤하고 괴로운 삶이다. 난 이러한 삶의 태도를 남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면서 행동하고 명령에 의해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깊은 '연민'을 아직까지 갖고 있다. 또 한나 아렌트가 분석했듯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평범함banality과 무관심이 현대인의 악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끊임없는 경계를 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공부를 하는 이유는, 인문오타쿠가 되어서 사유를 박제화하거나 '사유화'하면서 남들에게 뽐내느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책보면서 자위적인 만족을 얻는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기쁨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내가 싫어하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인문학(liberal arts)의 '효용'은 사회에서 흔히 운위되듯이 부르주아적 교양의 증진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능력의 함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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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는 외교학과에서 3학년 2학기까지 마친 ‘고학번’이고 현재는 휴학 중에 있습니다. 오랜만에 이렇게라도 후배님들을 만나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모두 다 저보다 능력이 출중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에, 여러분들에게 ‘감히’ 조언을 하기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국제정치학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두서없이 늘어놓으려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며, 학과의 어떤 공식적인 입장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각자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무시하면 됩니다.


  이 짧은 글을 통해 여러분에게 제가 전달하고 픈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당위적인 것으로 외교학과에서 공부하는 이상, 우리는 '바나나' 국제정치학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방향설정에 관한 것으로 외교학(국제정치학)은 국제학적인 성격과 정치학적인 성격을 두루 지니고 있으며 외교학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나나'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없는 소리냐고요.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과일 바나나뿐만 아니라 바나나에는 다른 속뜻이 있습니다. 바나나는 겉은 노랗지만 속은 대체로 하얗습니다. 이를 빌어 미국인들은 ‘바나나’를 자신의 직접적인 문화적 뿌리는 아시아인이지만 생각이며 말투며 가치관이 백인 미국인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합니다. 다소 경멸적인 어조로 말이지요.


  즉 ‘바나나’는 국제정치학에 적용한다면 자기가 자라고 또 자신의 후손들이 계속 삶의 터전으로 삼을 이 땅에 대한 고민 없이 미국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게 자신의 문제를 소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처방을 내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는 ‘바나나 공화국’이며 이런 사람들이 펼치는 외교는 ‘바나나 외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우리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세계화나 국제화의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외교학과도 예외는 아니지요. 오히려 '국제학'적인 성격을 띤 외교학과는 다른 어떤 학과보다도 국제화의 바람이 높지요. 하지만 세계인이 된다는 것은 '사실상' 대개 미국인처럼 말하고, 미국인처럼 말하고, 미국인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화와 국제화의 척도 역시 영어를 잘하는 것과 등치되고 있고요. 영어는 물론 국제화를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학교를 다니다보면 영어로 페이퍼를 쓰고, 발표를 하는 것에 사람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을 쉽사리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단 이건 외교학과나 정치학과만은 문제는 아닙니다. 학문으로서의 국제정치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막연히 국제정치학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떠올려 보세요. 책을 쓴 사람 중에 흑인 국제정치학자가 있나요? 여성 국제정치학자가 있나요? 무슬림 국제정치학자가 있나요? 아니면 한국인 국제정치학자가 있나요? 이런 다른 여러 조건들을 차치하더라도 대부분의 국제정치학 저술들은 미국에서 주로 WASP에 의해 생산되고 있으며 그들의 언어인 영어로 유통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바나나 국제정치학이 될 수도 있다는 위험을 항상 경계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해방 이후 갓 시작된 한국의 국제정치학은 단순히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의 학문을 그대로 수입해다가 한국의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국제정치학이 한국의 분단현실보다는 제3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미국인들이 고안해낸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말처럼 미국인들에게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와 외교의 연장’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관점에서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포기이자, 모든 것의 종언’일 뿐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국제정치학자는 적어도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임하는 자세가 다른 이들과는 달랐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전의 한국 국제정치학자들은 미국인들처럼, 그 중에서도 강경파처럼 사고하고 마치 게임을 하듯이 국제정치적 전략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입장에 대한 이러한 반론도 가능할 것입니다. 당시는 냉전이었고 89년 이후 냉전이 끝나면서 실제로 ‘국경 없는 세계’가 이루어지고 세계가 하나가 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일면 타당한 말이기도 합니다. 경험적으로 제 주변만 봐도 해외에 나가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죠. (여러분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국가들 간의 상호의존도도 매우 높고요.


  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국경 없는 세계’의 자유는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이죠. 유럽을 한 번 가보려면, 아무리 싸게 표를 구해도 100만 원 정도가 비행기 삯으로 들어갑니다. 가까운 중국, 일본이라고 해도 50만원 상당의 돈을 써야하는 것은 마찬가지고요.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만약 한반도에서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아마 다보스 포럼에 초청받은, 혹은 그런 자격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 정도 아닐까요. 그들에게는 이미 세계에 국경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화, 국제화가 되어 국경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국경을 넘어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적어도 한국에서 국제정치학 공부를 시작한다면 이러한 기반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정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느냐’를 가르는 문제라는 것을 항상 마음 깊숙이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즉 여차하면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인천공항을 통해 이 땅을 훌쩍 떠나고 미국으로 가서 미국 국무부나 국방부 관리들과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면서, 한반도의 일을 강 건너 불 보듯, 남의 집 구경하듯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한국에서 국제정치학 공부를 한다면 한반도의 역사적 고뇌를 이해하고 미국엘리트의 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눈과 머리로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국제정치학’의 대부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발달한 것이며, 이는 사실 ‘제국정치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고안해낸 여러 개념들을 ‘직수입’해서 정밀하게 파헤쳐보며 이를 한국적 맥락에 맞게 고안해내는 지적 작업을 동시에 병행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미국 대학에서 ‘Political Science’를 공부하는 아이들보다 2배 더 많은 양을, 그리고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또 직수입하려면 여러 외국어들도 섭렵해야 합니다. (부끄럽게도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도 그런 능력은 아직 못 갖추었습니다.)


  이는 제 일천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근대와 탈근대, 때로는 전근대가 혼재하는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복잡한 맥락을 공부하시다보면, 국제정치학 공부를 그만두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엄청난 리딩 양도 추가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를 포기하고 ‘제국정치학’의 추종자가 되거나 한국의 맥락을 무시하고 수단이나 아프간 같은 딱 봐도 문제 있는 나라, 잘못과 책임이 분명한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아무리 힘들고 고된 길일지라도 저는 바로 이 곳! 한국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개입하기 위해 한국 국제정치학이 존재해야한다고 그리고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앞으로 학문으로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야합니다. 특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의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약소민족으로서 한국인들이 겪어 나와야 했던 그 중에서 한국 역사의 대다수였던 민중들이 겪어온 고통과 아픔에 대한 각별한 역사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한’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변 사람들과 국제정치/국내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기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이 무심결에 이야기하는 정치에 대한 코멘트들을 유심히 살피십시오. 그것들은 여러분들이 여러분 나름의 국제정치를 설계하는 데 있어 매우 긴요하고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어떤 국제정치 논문이나 싱크탱크들의 정보보다 유용한 것들입니다.

 

  제가 추천한 방법들이 단순히 국수적 민족주의자가 되라는 주문이 아닙니다. 이를 통해 일반적인 국제정치학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하여 외부를 해바라기처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우리를 이해하는 데 힘쓰자는 것입니다. 남을 공부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명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생각은 글로벌 하되, 행동을 국지적으로 하자는 제 나름의 주문이기도 합니다. 


  두서없는 글이 약속한 것보다 너무 길어졌네요. 이제 논의를 좀 정리해보겠습니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기존까지의 한국에서의 국제정치학은 '바나나' 국제정치학이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국제화 바람이 한국을 강타하면서 우리 국제정치학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단순히 이 땅을 떠남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밖’을 바라보며 이 안의 모순을 극복하는 동시에 이곳을 조금 더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데 노력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강대국 정부나 다국적 기업이 말하는 단순한 ‘국제화’나 ‘국제주의’와는 다릅니다. 바나나 정치인이나 바나나 지식인의 가슴으로는 느낄 수 없는 우리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의 아픔 그리고 역사적 모순에 대한 애정 어린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땅에 절실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우리 자신의 처방과 철학을 다듬어내는 것. 그것을 통해 전 인류의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한국적 모델이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문명을 이룰 것이요, 진정한 국제주의와 참된 세계시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한국 국제정치학은 이를 위하여 노력하는 학문이며 외교학과는 그 피튀기는 콜로세움이자 요람입니다. 이 기나긴 대장정에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를 다시 한 번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자유전공 멘토링 모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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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소식이다. 하워드 진과 제롬 샐린저가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 힘들다기보다는 재미가 없었던 수능 공부를 하다 지겨울 때면 나는 야간자율학습을 ‘자율적’으로 나와서 학교 근처에 있는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곤 했었다. 그 땐 평범한 고등학생이어서 책을 많이 알지도 못했고 동네 서점에 그리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난 주로 이름을 들어봤음직한 미국 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라든가, 촘스키의 <불량국가>가 그 때 나름대로 재밌게 읽은 책들이다. 


 
나는 그 때 하워드 진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책이었는데,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항상 학생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했고 학생은 어릴 때부터 편파적인 시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논리로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았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매일 학교 각 학급마다 조선일보가 ‘무료’로 배달되었었는데, 학교의 논리를 전용하여 ‘학생의 중립성’을 위해서는 한겨레신문까지 봐야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학급에 동시에 배달되어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전혀 학급에서는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겨레신문을 아니 신문을 보는 아이들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끽해야 조선일보의 논리와 한겨레신문 논리 중간에 포지셔닝된 아이들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당시엔 난 기계적인 중립을 외치고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택하는 것은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만 했을 뿐, 이를 어떻게 언어화해야하는지를 잘 몰랐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당시 나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해준 책이었다. 다소 유치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저 책을 읽고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마치 내 이야기인양 외고 다녔다. 결국 ‘진빠’-진중권빠가 아니다-였던 나는 친구들로부터 공인되어 생일선물로 <불복종의 이유>라는 하워드 진의 책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친구는 다소 장난조로 왠지 네가 앞으로 이렇게 살 것 같다면서 저 책을 주었는데, 책과 하워드 진의 삶에 비추어볼 때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다행히 그 친구는 자신이 그런 말을 했는지 잊고 있다)

 
하워드 진은 그의 학술적 성과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삶을 통해 행동하는 양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여러 훈장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을 증오를 증폭시키는 데 이용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경험을 통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며, 전쟁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잔혹하게 만드는 지 증언하는 데 사용했다. 당시 HID라든가, 재향군인회의 폭력적인 언설과 시위를 보고 듣고 자란 나로서는 하워드 진의 존재는 매우 큰 ‘문화 충격’이었고 살아있는 양심의 등불이기도 했다. 단순히 가치론적으로 생명과 평화가 소중하고 전쟁이 나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설하는 그의 글은 아직도 쉬이 잊히지 않을 정도로 힘이 있었고 이는 내가 생각하는 참 '지식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하워드 진의 책을 읽지 않았다. 그 유명하다는 그의 <미국 민중사>도 읽어보지 않았다. 대학생으로서의 나는 친구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하워드 진이 아니라 샐린저나 하루키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샐린저의 책 역시도 하워드 진의 책처럼 나름의 인연이 있다. 내가 학교 근처 헌 책방에서 처음으로 구입한 책이 샐린저의 그 유명한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아마 조홍진이 직접 추천했든 조홍진이 고등학교 때 저 책을 영어로 읽어서 자극받았든, 아무튼 조홍진의 영향이었다고 기억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은 새내기 때 ‘까칠’했던 나와 흡사한 인물이었다. 당시 나는 모든 것이 불만이었다. 홀든이 책에서 255번 갓뎀을 외쳤다면 나는 300번은 족히 넘었을 거다. 반 학생회 활동도 불만. 대학 수업의 질에 대해서도 불만. 세미나에 대해서도 불만. 대학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불만. 너무나 먼 학교에 대한 불만. 경제학 성적에 대한 불만. 돈이 없는 집에 대한 불만. 가족에 대한 불만. 정부에 대한 불만 등등. 사람들과 인사도 잘 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피하거나 마지못해 손을 흔드는 게 내 일상이었다. (이런 나를 조금 고쳐준 게 장명완이다.)

 
하지만 셀린저가 나에게 더 큰 의미를 갖게 된 이유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다. 어느 날 우연히 당연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한 샐린저가 살아있으며 그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일약 문학적 명성과 세계적인 부를 거머쥐었지만, 그는 은둔생활을 택했다. 그는 몇 번의 연애와 결혼 이외는 그의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그의 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했지만 나는 참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를 썼지만, 과연 그의 삶은 시처럼 아름다웠는가? 이광수는 뛰어난 소설을 썼지만, 그는 과연 소설에 버금가는 인생을 살았는가? 서정주, 이광수와 비교해서 생각해볼 때도 샐린저는 참으로 자신의 작품과도 합치하는 삶을 살았다. 이는 그의 행동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 현실에서 느끼기 어려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은둔을 하면서도 소설을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기자가 그의 집에 찾아가 질문을 던졌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데 왜 소설을 쓰고 있냐고. 샐린저가 대답했다.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어쩌면 세상을 떠나는 직전까지도 샐린저는 계속 자기 자신만을 위한 소설을 써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줄 필요 없는 진정한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자신의 작품을 탈고하자마자 카탈로니아의 전선으로 향한 조지 오웰도 멋있지만, 나는 위와 같은 샐린저의 ‘기인’ 같은 풍모가 진정으로 아름다웠다.

  오늘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두 명의 너무나도 다른, 혹은 너무나도 비슷하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작년 레비-스트로스와 헌팅턴에 이어 크리스 하먼, 다니엘 벤사이드까지. 세상을 주유하면서 한 번은 만나고 그들의 육성을 듣고 싶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세상을 등지니 진심으로 가슴이 아프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사람 중 하나로서,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깊게 성찰하는 일만이 남아있다.

  그 둘의 안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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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티에 진도 7.3-7.5 사이의 강진이 일어났다. 200년 만의 대지진으로 5만 명에서 1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소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대통령궁도 지진을 피해가지 못했으며 아이티 상원의장은 현재 건물 잔해에 매몰되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이다.


 
분명히 이번 강진은 기본적으로는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이후에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야기한 자연 재해다. 그러나 이 엄청난 피해를 단순한 자연재해의 결과만으로는 볼 수는 없다. 수도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 인근에서 지진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바로 이웃 국가인 쿠바와 심지어 같은 히스파뇰라 섬에 위치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논자들이 이를 지적하면서 이번 지진을 아이티의 ‘인재’(人災)로 규정하고 있다. 열대우림을 국가적으로 보존하여 지진의 충격을 자연적으로 흡수한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달리, 아이티는 무분별하게 열대우림을 개발했고 이로 인해 이번 지진에 아이티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논자들은 이번 지진 그 자체보다도 이를 관리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가 시스템의 부재를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필자는 이런 논자들의 지적에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하지만 단순히 이번 지진을 아이티만의 국내 시스템의 문제로 축소, 환원시키는 데에는 반대한다. 아이티에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시작된 근대, 아니 어쩌면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시작된 근대의 많은 문제들이 역사적으로 두텁게 퇴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아이티 지진을 통해 봐야 하는 것은 카리브 판과 북아메리카 판의 충돌뿐만 아니라, 아이티라는 국가 아래 두텁게 누적된 역사적 지층의 모순이기도 한 것이다. 


  아이티(Haiti)는 카리브 해 히스파뇰라 섬에 위치한 인구 900만 정도의 작은 도서 국가다. ‘히스파뇰라’라는 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492년 콜럼버스가 1차 항해 가운데 ‘발견한’ 섬 중 하나다. 에스파냐 세력과의 불평등한 조우 이후 이곳의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전염병으로 모두 절멸되고 에스파냐는 이 섬을 개발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끌고 왔다.
 

  훗날 히스파뇰라 섬은 분할되어 에스파냐는 현 도미니카 공화국 지역을, 프랑스는 현 아이티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프랑스는 이 지역(당시의 이름은 생 도밍그(Saint Domingue)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특화하고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아이티는 프랑스 국가 수출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황금 거위가 된다. 당시 생 도밍그 섬은 프랑스의 커피와 설탕 소비량의 50%를 생산해냈다.


  물론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00년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식민지 착취 구조 속에서도, 흑인 노예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자각하고 의식을 키워왔으며, 미국 독립과, 결정적으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아, 지도자 투생 뤼베르테르(Toussaint L'ouverture)를 위시로 하여 노예 혁명을 일으킨다.


 
프랑스는 분명 대혁명의 국가였으나, 그들이 주장한 ‘인권’은 프랑스라는 ‘국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혁명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인간'이 아닌 흑인 노예들의 혁명을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변변치 못한 농기구로 무장한 아이티인들은 지형을 이용한 신출귀몰한 작전을 통해 당시 유럽 최강의 군대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다. 결국 아이티 독립 전쟁은 프랑스가 신대륙 경영을 포기하고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미국에게 매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중남미에서는 처음으로 독립을 자신의 힘으로 직접 쟁취한 국가 아이티의 미래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어느 국가도 아이티를 국제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국가들의 관행에 따르면, 국제적으로 승인을 (문명국가인 자신으로부터) 받지 못한 국가는 아무리 실효적 요건을 갖추었더라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외엔 아무 것도 갖추지 못했던 아이티로서는 이는 매우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티는 '혁명'의 국가이자 아메리카 대륙의 맹주인 미국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시민혁명의 선두국가 미국 역시 아이티의 고립에 앞장섰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시민권 역시 미국 내 흑인 노예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아이티의 노예 혁명은 마치 쿠바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절대로 성공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이티의 흑인들은 식인종, 은혜를 모르는 자, 야만인, 부두교 신자로 폄하 당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는, 그리고 미국의 노예들이 해방되는 1862년까지 아이티의 국제적 승인을 완강히 거부했다. 


  182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 독립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들 역시도 자신들과 같은 메스티조가 아닌 '흑인'들로 구성된 작은 섬나라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국제정치적 고립,
경제적 궁지에 몰린 아이티는 1833년 프랑스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엄청난 배상금(노예 소유주와 그 가족들의 정신적 물적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심지어 그 자금 역시도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빌려야했다. 아이티는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식민주의적 지배로부터는 탈피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자본이 피폐해진 아이티의 경제를 장악했다. 미국은 아예 노골적으로 1915년에는 아이티에 해병대를 파병해 이를 무력으로 점령한다. 그리고 미국은 그 전까지 외국인의 기업 운영을 제한하던 아이티의 법을 개정한다. 미국은 이후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민주주의"와 "반공"라는 미명 아래 아이티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와 같은 식민주의적 지배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1956년 미국은 아이티로부터 철수했으나 미국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프랑수아 뒤발리에(일명 파파독)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미국은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뒤발리에 정권을 비밀리로 지원했고, 뒤발리에 정권은 그의 아들 장-클로드 뒤발리에(베이비 독)까지 이어진다. 1986년까지 이어진 뒤발리에 가문의 독재로 아이티는 아메리카의 보석 아이티는 서반아의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그 가운데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지막지한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해방신학으로 주목을 받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했고, 그는 1991년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아이티를 대하는 태도는 200년 전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아리스티드는 독재 정권 아래의 여러 잘못된 정책들을 시정하려는 아리스티드 정권의 노력(빈민 농가에 대한 지원, 착취적 노동을 자행하던 공장에 대한 규제와 노동자의 권리 보장 등)은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아리스티드의 개혁 정책은 좌초하고 이러한 그의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불만을 표한 기존 아이티의 엘리트들의 반감을 사고 결국 아리스티드 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8개월 만에 무너지게 된다. (미국은 이 쿠데타를 암묵적으로 동조했으며 이를 묵인했다.) 아이티의 정국 혼란이 계속되고 아이티 보트피플들이 미국으로 계속 유입되자, 미국은 쿠데타 이후 3년이 지난 1994년 아리스티드를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시킨다.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권좌로 복귀하는 조건으로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아들였으며, 아이티의 여러 핵심 산업을 국제 자본에게 개방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권좌 복귀 이후에 아리스티드는 약속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고, 그의 ‘좌파적’ 성향에 신물이 난 미국은 그가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고 비판하며 국제 원조를 일방적으로 중단했고, 종국에는 2004년 반 아리스티드 쿠데타를 사주해 그를 축출한다. (아직도 그는 보호의 명목으로 남아공에 구류되어 있다.) 이후 아이티에는 ‘평화유지’의 명목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된다. 


  길게
전술했듯이, 이번 아이티 지진의 피해는 단순한 자연 재해의 결과가 아니다. 아이티의 천재는 탓할 수 없는 자연의 조건이지만, 이것을 시정하고자 하는 아이티인들의 노력은 근대를 시간 축으로 하는 500년의 역사 동안 외세의 개입 국제 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되어 왔기 때문이다. 즉 아이티의 이번 지진은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결합한 것이며 그 뒤에는 냉엄한 국제질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제경제질서 역시 아이티의 자생 노력을 끊임없이 좌절시켰다. 뒤발리에 정권 하에서 시작된 아이티 경제의 개방은 아이티에서는 '공장'과도 다름없는 토지를 외국인들이 모조리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고, 다시 돌아온 미국과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는 서구 자본들은 아이티 엘리트들과 손을 잡고, 플랜테이션을 부활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이티의 열대우림의 개발 자본에 의해 파괴되었고, 어렵사리 복구되고 있던 아이티의 마을 농업 체계는 붕괴되었다. 미국의 값싼 쌀은 아이티에 대규모로 수입되었고, 가격경쟁력이 없었던 아이티의 쌀 농가는 완전히 무너졌다. 미국을 위시로 한 '국제사회'는 생존권이 파괴당한 그들에게 '국제구호'의 이름으로 식량을 지급했다.


  아이티의 국가 기구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웠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국가의 규제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기능을 거의 완전히 마비시켰다. 오히려 아이티에는 기본적인 공공재를 제공할 국가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를 대신한 것이 갱들이었다.) 


  현재 미국을 위시로 하는 ‘국제사회’가 앞 다투어 아이티에 대한 신속한 지원을 약속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들려온다. 한국정부도 국제 공헌과 국격 제고를 내세우며 동참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티의 처절한 현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일견 국제적 지원은 국제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아이티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국제사회의 긴급구호, 물적 지원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전에 전제되어야 것은 현재의 아이티를 만들어낸 역사적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며, 국제사회의 지원이 실상은 ‘악어의 눈물’이 아닌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과 진정으로 아이티인들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


  이제는 그들이 '스스로' 정의를 세울 수 있게 돕자. 그리고 300년 동안 계속된 아이티의 슬픈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 미국은, 유럽은,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를 배워야 한다. 아이티의 슬픈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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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

2009/12/24 14:33 from 雜_앓음다움.

  1977년, 22세의 트럭 운전수 제임스는 친구와 스타워즈를 보러갔다. 영화를 보고 난 카메론은 화가 치밀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남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에서 학교 급식을 배달하는 트럭운전수로 일하던 그는, 여가시간에 조그만 모형들을 색 칠하고 SF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제 그는 맥 빠지는 현실에 직면해버렸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바로 그런 종류의 세상을 루카스는 이미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스타워즈는 바로 그가 만들어야 했던 영화였던 것이다. 그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싸구려 영화장비를 사서는 루카스가 어떻게 그런 영화를 찍었는지 알아내려 했다. 그는 거실에서 눈이 멀 정도로 강한 조명 아래 부인을 세워두고, 카메라를 움직이며 카메라 이동 장면을 연습해 부인을 화나게 했고, 특수효과에 대한 책들을 읽기 위해 남 캘리포니아 대학 도서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홀랑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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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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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9 30

2009/09/30 10:55 from 雜_앓음다움.

모든 게 다 끝나기 위해 존재하는 듯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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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념 속의 세계는 이미 왜곡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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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자리

2009/09/22 09:47 from 雜_앓음다움.

우리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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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영화, 사람

2009/09/17 09:52 from 雜_앓음다움.

지하철에 앉아 ‘누군가’(or 누군가들)와 ‘처음으로’ ‘함께’ 봤던 영화들을 떠올려 본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아직까지 영화와 함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그들의 모습, 당시의 영화의 느낌, 영화관의 공기까지 지긋이 떠올려 본다. 참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원스>/ 서울
<굿바이 레닌> / 하이퍼텍나다
<러브 액츄얼리> / 서울
<이프 온리> / 동대문 MMC
<살인의 추억> / 동대문 MMC
<태극기 휘날리며>/ 서울
<다섯 개의 시선> / 씨네코아
<웰컴 투 동막골>/ 피카디리
<매트릭스2> / 동대문 MMC
<기담> / 씨네코아
<박쥐> / 입구역 씨너스
<극락도 살인사건> / 강남 메가박스
<클림트> / 강남 메가박스
<클로져> / 녹두
<쏘우> / 신촌
<킹덤 오브 헤븐> / 돈암
<연애의 목적>/ 돈암
<마더> / 서울대 씨너스
<청풍명월> / 부산
<S다이어리> / 대학로 판타지움
<공동경비구역 JSA> / 건영옴니
<청연> / 서울
<우리는 액션배우다> / 하이퍼텍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 / 건영옴니
<타인의 삶> / 녹두
<화려한 휴가> / 서울
<정글북> / 대지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 / 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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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이라는 주제로 열린 한겨레 시민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화요일에 시간이 나기도 했었고, 강연자가 문학평론과 관련된 훌륭한 논문을 쓰셨던 도정일 씨(경희대 명예교수)라서 인터넷을 통해 보기보다는 직접 가서 육성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몸이 몹시 안 좋았지만 무리 했습니다.)


  강연 장소는 한국 프레스 센터. 정말 꼬꼬마 시절이었던 1학년 때 세미나 식구들과 김용택 시인의 출간 기념회를 왔던 바로 그곳이더군요. 100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강연장을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자리를 찾기 힘들어서 창가에 앉아서 도정일 선생님의 강연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은 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우선 강연은 ‘야만’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합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그의 책 <야생의 사고>에서 밝힌 것처럼 이른바 문명 시대에도 ‘야만’ 혹은 ‘야만적 사고’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세계대전, 다르푸르 사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 시대의 야만은 원시 시대의 야만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그리고 더 끔찍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요. (홉스봄의 말처럼 20세기는 인간의 야만성의 끝을 보여준 세기였죠.) 그리고 그러한 ‘야만’은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혹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됩니다.


  도 교수는 우리의 일상 속에 이러한 야만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인지하고, 이를 역사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식을 통해 성찰하며, 이러한 야만의 역사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 교수의 ‘인문정신’은 단순한 학적 의미의 인문학, 제도적 의미의 인문학과도 구별됩니다.)


  시민들이 인문정신-최소한의 성찰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종의 ‘책임의식’이 필요합니다. 도 교수는 구체적으로 4가지 책임 영역(역사, 사회, 문명, 인간)을 언급합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이미 언급한 인문정신의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틀린 역사, 야만의 역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다시 우리 사회에 반복되지 않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를 끊임없이 공부하고, 이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며, ‘불편한 진실’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을 망각하는 순간, 야만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민주주의가 반석에 올랐다고 자만에 빠지는 순간, 민주주의의 전면적 퇴행, 위기가 시작된 현 상황과도 부합됩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 연결됩니다. 역사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사회에 대한 ‘정치적인’ 진단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사회가 과연 인간적인 가치들을 구현하고 있는가? 이를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발언해야 합니다. 현 정부처럼 단순히 ‘선진화’ 담론만을 외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선진화’인지,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지 명백한 비전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치관과 통치자, 이를 지지하는 대중들의 정신(영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단순한 실용이 아닌, 무엇을 위한 실용인지를 명백히 제시했다면, 좀 더 많은 담론과 토론이 가능했을 텐데, 현재 상황은 이명박 정부 자신도, 그리고 대중들도 과연 무엇을 비판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문명에 대한 책임은 일종의 대세적 책임입니다. 이제 세계의 문제는 단순히 우리 사회만을 변혁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은 인간의 생존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구와 자연을 파괴하고 자연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지속불가능한 생산과 발전은 결과적으로 우리 인간의 삶을 위협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적인 거버넌스를 통해 해결해야겠지만, 그 출발점은 개인적으로도 지역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먼저 생태적인 삶을 구상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실천은 개인으로부터,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호의존의 시대에, 나의 능력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자립적, 독립적인 생활 방식을 고민해봐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책임은 일종의 윤리의식입니다. 인문(人文)이란 말 자체가 ‘사람의 무늬’를 뜻하기도 한다면, 인문학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동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하는 것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가난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의 품격을 떨어뜨립니다. 가난해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돈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적 가치일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돈을 통해서 정말 행복해졌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본질적인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관계, 인간 공동체 아닐까요?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공감의 능력, 연민의 능력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 가장 구체적으로는 한국 교육의 무자비한 경쟁의 결과, 현재의 한국 사람들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역지사지, 타인의 고통d에 대한 감정이입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주 고귀한 영역입니다. 이것들은 책임과 윤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가장 먼저 회복해야할 가치입니다.


  물론 이를 실천한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개미지옥에 빠지는 순간, 이를 빠져나온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 자신의 고도의 결단과 거의 종교적 수련에 가까운 고민을 통해 이를 단순히 외부에서 주어진, 혹은 해야 되는 것이라는 도덕 법칙(의무)이 아니라, 이를 내가 해야 할 것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인 것(윤리)이라면, 우리는 작은 것에서부터 이를 실천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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